‘시간’을 재료로 풀어낸 인간의 삶과 죽음

  • 문화일보
  • 입력 2015-03-0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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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도치된 탄생(Inverted Birth, 2014). 8분 22초.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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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국제갤러리서 열려
한때 ‘백남준 조수’ 인연


단지 7개의 작품. 하지만 이를 감상하는 데는 2시간하고도 20초가 더 걸린다. 보는 시간만 따졌을 때다. 작품을 건너고 전시관 사이를 이동하는 것까지 합하면 세 시간은 족히 할애해야 한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의 거장(巨匠) 빌 비올라(64·사진)가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2·3관에서 연 개인전은 미술의 시간적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설치미술이 공간을 지배한다면, 비디오 예술은 시간을 지배한다. 그는 “오랜 기간에 걸친 영상 작업을 통해, 나는 시간을 명백한 물질로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실질적인 재료”라고 했다.

전시에는 한 남성이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모하비 사막을 홀로 걷는 외로운 여정을 담은 ‘내적 통로(Inner Passage, 2014)’, 각자 여행 중이던 나이 든 여인과 젊은 여인의 짧은 마주침을 그린 ‘조우(The Encounter, 2012)’ 등 2005∼2014년 제작한 것이 나왔다. 적으면 7분 10초, 많으면 28분 31초까지 이어지는 작품들은 슬로 비디오(Slow Video)처럼 느린 박자로 흐른다. 눈앞에서 10분에 걸쳐 펼쳐지지만, 작품 속에선 1분이 채 안 지난 시간일 수 있다. 암실에서 영상의 변화 과정을 관람하다 보면 물리적 시간과 작품의 시간은 완전 별개의 것이 된다.

개막 하루 전인 4일 전시장에서 만난 비올라는 “시간은 무한히 가질 수 없고 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며 “하지만 비디오 기술을 활용하면 이를 늘이거나 되돌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시간을 재료로 인간의 탄생과 죽음, 삶의 고통을 풀어냈다. 은유와 상징이 가득한 작품은 시적이고 철학적이다.

지난 5월 영국 런던의 세인트폴대성당에서 선보인 ‘순교자(Martyr)’ 시리즈는 그의 작품세계를 잘 나타내는 작품. 4개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밧줄에 매달려 바람에 흩날리거나 물줄기를 뒤집어 쓴다. 흙에 뒤덮이고 불덩이에 휩싸인다. 과거 만물의 근원이라 여겼던 물·불·흙·바람 4대 원소, 자연의 강력한 힘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하지만 끝내 감내해낸다. 비올라는 “고통은 삶에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라며 “죽음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가치나 신념을 지키는 모습, 인간의 인내력과 희생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는 이중 ‘물의 순교자(Water Martyr(2014)’가 출품됐다. 밧줄에 발목을 묶여 웅크려 있던 남성에게 거친 물줄기가 쏟아지자 거꾸로 매달린 채 하늘 위로 올라가 화면에서 사라진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한 성 베드로를 연상케 한다는 평이다. 세로 5m가 넘는 대형 스크린에 펼쳐지는 ‘도치된 탄생(Inverted Birth, 2014)’도 물을 소재로 한다. 검고 붉고 흰 액체를 뒤집어쓴 더러워진 육체, 표정마저 일그러진 남성이 고통에 떤다. 하지만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오르는 물줄기에 액체가 하나씩 걷히면서 정화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일련의 변화 과정을 역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40여 년간 작품활동을 이어온 비올라는 비디오 아트를 한 단계 진화시킨 작가로 꼽힌다.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대표로 참여했고,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74년 시러큐스대 재학 당시 백남준의 조수로 일한 인연도 있다. 비올라는 백남준에 대한 기억을 묻자 “내가 여태까지 만난 분 중 최고”라는 찬사를 보냈다. 전시는 5월 3일까지. 02-735-8449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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