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대한민국 갈등 리포트>유적발굴에 지역 숙원사업 제동 …‘개발 vs 보존’ 가치 충돌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6일 오후 강원 춘천시 중도동에 위치한 레고랜드 건설 부지에서 본격적인 공사에 앞서 문화재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지난 13일 오후 3시쯤 의암호에 떠 있는 강원 춘천시 중도(中島) 레고랜드(레고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 건설 현장.

인부 170여 명이 모여 공사를 진행 중인 이곳에서 이질적인 장면이 쉽게 눈에 띄었다.

인부들의 연령대는 60대 이상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은 굴착기 등 중장비를 이용하는 대신 호미와 모종삽을 들고 있었다. 공사 현장이라기보다 잡초 제거 현장을 연상케 하는 이 같은 풍경에 공사 관계자는 “본격적인 공정 전 문화재를 발굴하는 단계”라며 “호미 등으로 어딘가 묻혀있는 문화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5011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129만1434㎡의 땅에 세계 최대 규모의 레고랜드를 짓겠다는 계획은 아직은 설익은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난 2014년 11월 28일 기공식이 열렸지만 대규모 문화재 발굴이라는 뜻밖의 상황에 부딪혀 개발 찬·반 논란이 한창이다. 그 사이 문화재 보존의 논리는 물론 영세상권 악화, 계약의 절차적 문제 등이 갈등 목록에 추가되면서 찬·반 대결 구도가 점점 복잡해지는 모양새다.

◇문화재보존론에 휘말린 ‘개발논리’의 꿈 = 지난 2008년 레고랜드 라이선스를 보유한 멀린엔터테인먼트그룹(멀린사)이 춘천 중도에 레고랜드를 짓겠다고 제안한 뒤 2013년 10월 강원도청과 본계약을 맺을 때만 해도 사업은 물 흐르는 듯했다. 2011년 투자합의각서가 오갔고 다음 해에는 강원도청과 춘천시청 등이 레고랜드 조성사업을 위해 설립된 엘엘개발이라는 특수목적법인(SPC)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도청 관계자는 “20%대의 재정자립도를 갖고 있는 강원도 입장에서 세계적 테마파크의 유치가 가져다줄 관광 수익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3만㎡ 이상 사업 부지에서는 공사 전 매장문화재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2013년 10월부터 중도 일대에 발굴 조사가 이뤄지면서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다. 2014년 7월 레고랜드 부지에서 고인돌 101기와 집터 917기, 대형 환호(環濠·마을 주변을 따라 파놓은 도랑)의 흔적, 비파형 동검 등 청동기시대 유물 1300여 기가 발굴됐던 것이다. 춘천 고조선유적지보전협의회(보전협의회) 등 레고랜드 개발을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이 결성돼 보존논리의 목소리는 점점 거세졌다.

문화재청의 승인이 없으면 공사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엘엘개발과 강원도청은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에 엘엘개발 측은 ‘지석묘 101기 중 36기 등 유의미한 유적을 레고랜드 확장 부지와 인근 역사 박물관에 이전해 복원하고 나머지는 복토보존(원형 그대로 해당 지역의 흙으로 다시 덮어놓는 것) 하겠다’는 절충안을 제시했고, 2014년 9월 문화재청은 이 대안을 받아들였다. 문화재청은 지하 하부구조 공사 없이 땅 위에만 건물을 짓는 레고랜드의 경우 이 같은 방식으로도 유적을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학계에서도 엇갈리는 중도 유적 가치 평가 = ‘개발 대 보존’의 가치갈등에서 보존주의자들은 중도 유적의 규모와 가치가 여타 선사시대 유적의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형구(역사학) 선문대 석좌교수는 “900기가 넘는 집터에 가구당 최소 7~8명이 살았다고 가정하면 6000~7000명의 주민이 거주한 대단위 취락으로 볼 수 있다”며 “환호의 존재, 가옥의 배치 등으로 따지면 근세의 읍성이라기보다는 고대의 궁성에 해당하는 세계적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문화재청의 판단을 옹호하는 최성락(고고학) 목포대 교수는 “900개 집터는 기원전 14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한 시기에 7000여 명이 함께 살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전남 여수에서도 수차례 발견된 비파형 동검이 중도에서 발견됐다고 이 지역을 고조선의 중심으로 보는 것 역시 무리”라고 말했다.

◇경제문제 등 다양한 내용으로 확대되는 갈등 = 갈등 구도는 개발·보존의 가치 대립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러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레고랜드와 함께 들어설 아웃렛에 맞서 지역 상인들이 벌이는 경제갈등이 대표적이다.

윤기명 조운명동 번영회 운영위원회 회장은 “그렇지 않아도 대형마트가 많은 춘천에 아웃렛까지 들어서면 골목 상권은 더 피폐해질 것”이라며 “상인들과 연합해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춘천시의 레고랜드 추진단 관계자는 “이번 사업으로 9800여 명의 일자리 창출, 5조 원의 생산유발효과,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 유치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며 “장기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지역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반박했다.

또 레고랜드 추진이 특혜 등 무리한 방법으로 이뤄졌다는 주장도 불거져 ‘행정절차상 갈등’의 모습을 보이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오동철 춘천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장은 “레고랜드를 유치하기 위해 전체 사업비의 약 20%를 부담하는 멀린사에 운영상 수익의 90%를 배분하는 구조로 계약이 맺어졌다”고 비판했다.

이에 레고랜드 추진단은 “시설 임대료, 인건비 등을 제외하면 멀린사가 가질 수 있는 금액은 배분 수익 중 10%에 불과하다”며 “토지 무상임대 부분은 외국인투자촉진법에 의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끝없는 대치에 법원으로 넘어간 갈등 =결국 보전협의회는 지난 1월 레고랜드 건설공사를 중단해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냈지만 법원은 신청인들에게 사법상의 권리가 없다는 이유로 한 달 만에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에 불복해 또다시 항고장을 제출한 이광원 보전협의회 대표는 “레고랜드가 다른 부지를 찾기만 하면 얼마든지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레고랜드 추진단은 현재 상황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다. 레고랜드 추진단 관계자는 “섬 속 테마파크라는 중도의 입지 조건을 포기하라는 건 사업을 하지 말라는 의미”라며 “오는 10월 문화재 발굴 조사가 완료된 뒤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보전협의회 측은 “가처분신청 외에 행정소송, 서명운동 등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을 벌여 현재 입지에서 레고랜드가 지어지는 일만큼은 반드시 막겠다”고 응수해 갈등 장기화를 예고했다.

춘천 = 이근평 기자 istandby4u@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