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지 않은 여자들’ 미워할 수만은 없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외도했던 남편과 사별한 순옥, 내연녀에 돌직구 날리며 恨풀어

내연남 가족곁서 눈치받는 모란, 구박 받으면서도 할 말은 다해

고등학교 시절 퇴학당한 현숙, 딸은 대학교수 시키려 안간힘

부모기대 어긋난 적 없는 마리, 뒤늦게 사춘기 겪으며 방황해

할머니, 엄마, 딸. 모두 ‘여자’의 다른 이름이다. 할머니, 엄마, 딸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호칭이자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KBS 2TV 수목극 ‘착하지 않은 여자들’(극본 김인영)에서는 다르다. 할머니도, 엄마도, 딸도 착하지 않다. 그들은 ‘여자’이기 전에 거친 세파를 뚫고 살아 나가야 하는 ‘사람’이다. 여성에게 순종, 희생을 강요하던 편협한 성 역할을 벗겨내자 양상은 다르게 흐른다. 생경하지만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네 캐릭터는 TV를 보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다.

◇ 남편의 내연녀에게 하이킥을 차는 할머니, 순옥

배우 김혜자가 연기하는 강순옥은 천생 여자였다. 부잣집 외아들과 결혼해 두 딸을 낳아 잘 길렀다. 그의 잘못이라면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다. 복합적인 이유로 남편은 외도를 했고, 그랬던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그는 요리 선생으로 활동하며 재벌가 며느리에게도 쓴소리를 곧잘 하며 명성을 쌓았다.

강순옥의 사전에 돌려 말하는 변화구는 없다. 오직 직구만 날린다. 주식 투자로 전 재산을 날린 딸 현숙(채시라)에게 “쫄지 마. 그만큼 괴로웠으면 됐다. 돈보다 중요한 게 자존심이고 품위”라고 일침을 놓고,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남편의 내연녀 모란(장미희)의 배를 냅다 걷어차 기절시킨다.

그러나 내연녀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는 함께 살자며 “쓸쓸한 빈집에서 죽어 가는 것보다 나한테 한 열흘 구박당하면서 명 재촉하는 게 낫지 않으냐”고 거침없이 말한다. 결국 모란을 데려온 순옥은 사위와 마주치자 “인사해, 자네 장인어른 세컨드”라고 대차게 소개하고 ‘불륜’이라는 제목의 책을 건넨다. ‘국민 엄마’ 김혜자의 멋진 전복이다.

◇ 딸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은 콤플렉스 덩어리 엄마, 현숙

고등학교 재학 시절 1980년대를 풍미한 레이프 개릿의 내한 공연장에 갔다가 찍힌 사진이 신문에 실리며 퇴학당한 현숙은 평생 공부 잘하는 언니 현정(도지원)에게 열등감을 갖고 살아왔다. 이 때문에 딸 마리(이하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며 대학교수에 떡 앉히는 것이 일생일대 목표다.

구설에 휩싸이며 교수 임용에서 탈락한 딸을 위해 학과장을 찾아가 “우리 마리가 수업할 수 있게 해달라”고 무릎 꿇고 빌며 “내가 무료로 가정부라도 하겠다”고 말하는 현숙의 모습에는 단순한 ‘헬리콥터 맘’으로 치부할 수 없는 부모의 애끓는 심정이 담겼다.

엄마에겐 철부지 딸이었고, 남편과 헤어진 이혼녀고, 믿었던 딸마저 더 이상 이해해주지 않는 엄마, 현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고달픈 여성의 대변자다.

◇ 엄마 품을 떠나 뒤늦은 사춘기를 겪는 딸, 마리

항상 우등생으로 자라며 부모의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지만 교수 자리를 잃고 뒤늦은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마리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벗고 싶은 욕망이 심연에서 꿈틀대는 착하지 않은 여자다. 자신을 위해 학과장 앞에 무릎 꿇은 엄마 현숙에게 마리는 말한다. “그렇게 교수 딸을 두고 싶으면 젊은 교수 데려다가 입양해. 아빠도 엄마가 지긋지긋했을 거다. 열등감, 자격지심, 엄마는 정신병자야”라고 독설을 퍼붓고 돌아서는 딸도, 그런 딸을 바라보는 엄마도 억장이 무너진다. 이렇듯 세상은 그들이 착하게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 ‘태양의 여자’ 등을 집필한 김인영 작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여자들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특유의 디테일한 캐릭터 묘사와 폐부를 찌르는 대사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 내연남의 가족들 곁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내연녀, 모란

죽은 내연남의 본처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함께 사는 모란은 참 독특한 캐릭터다. 순옥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추레한 제 꼴을 보이는 게,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언니라 부르지 말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순옥에게 “그럼… 이모라고 부를까요?”라며 눈치를 살핀다. 모란을 연기하는 장미희가 식사자리에서 “한마디 하라”는 순옥의 말에 “아름다운 밤입니다”라고 자신의 유행어를 드라마 대사로 표현할 때는 폭소가 터질 지경이다. 캐스팅의 승리다.

제작사 IOK미디어 신인수 대표는 “로맨틱, 판타지 드라마에서 벗어나 폭넓은 여성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를 보여주려 했다. 김혜자, 장미희, 채시라 등 기획단계부터 염두에 뒀던 배우들이 모두 캐스팅되며 명연기를 보여주고 있다”며 “막장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탄탄한 대본과 연출의 묘를 살려 이런 우려를 넘어 대중의 공감을 사는 미니시리즈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