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舊 지휘거장, 서울 봄밤을 달구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구스타보 두다멜이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LA필을 지휘하는 모습.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제공

베토벤(1770∼1827)이 교향곡 제3번 E플랫장조 ‘영웅(Eroica Op. 55)’을 완성한 것은 1804년. 그로부터 꼭 100년 후인 1904년에 말러(1860∼1911)가 교향곡 6번 a단조 ‘비극적(Tragische)’을 내놨다. 음악사의 기존 성취를 집대성하며 혁명적 새 길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 두 작품이 24, 25일(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잇달아 울려 퍼졌다. ‘영웅’은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이, ‘비극적’은 로스앤젤레스필하모닉 오케스트라(LA필)가 연주를 선보였다. 세계 지휘계의 신·구 거장인 안토니 비트(71)와 구스타보 두다멜(34)이 각각 이끌었다는 점에서 국내 클래식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 ‘엘 시스테마’ 스타 두다멜, 말러 6번 선사

일반적으로 어렵다는 느낌을 줬던 말러 교향곡이 국내에서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임헌정과 정명훈의 공이 크다. 임헌정은 부천필하모닉을 이끌고 2000년대 초 말러를 완주해 붐을 일으켰다. 2010년엔 정명훈이 서울시향과 전곡 연주에 나서 ‘말러 마니아(말러리안)’들을 열광시켰다. LA필과 함께 서울에 온 두다멜은 그런 바탕 위에서 기량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행운아다.

그는 ‘러키 보이’라는 타이틀을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인물이긴 하다. 베네수엘라 빈민 청소년 음악 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가 배출한 클래식계의 스타다. 30대인 그를 ‘마에스트로’라고 부르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걸출한 실력을 자랑한다. 그는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초청한 이번 내한 공연에서 말러와 드보르자크(‘신세계로부터’) 등을 들고 왔고, 25일 공연은 말러 6번에 오롯이 바쳐졌다.

막간 휴식 없이 90여 분 펼쳐졌으니 말러 6번의 속도로는 평이한 편이었다. 오케스트라 대편성도 말러 연주로 봐선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15명의 LA필 단원이 제각기의 악기를 두고 무대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위용이 넘쳤다. 더블베이스와 호른이 각각 9대인 편성을 보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말러 6번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운 타악기 ‘나무망치’는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비극적’이라는 제목을 지닌 작품에 대해 축제라고 말한 것은 말러 자신이지만, 두다멜은 ‘모두를 위한 음악’에 대한 신념을 가진 사나이답게 말러를 말랑말랑하게 전하고 싶어했다. 리허설 때부터 그는 단원들에게 스스로의 귀로 음악을 즐겨달라고 당부했다. 이 작품에서 자주 울려퍼지는 북 소리의 퍼짐에 대해 섬세하게 신경을 쓰면서도 단원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말러 6번은 축제로 즐기기엔 음울한 작품인데, 두다멜의 캐릭터는 공연을 좀 더 편안하게 즐기게 해 줬다. 그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느린 안단테 모데라토 악장보다는 빠른 스케르초 악장에서 돋보이는 느낌이었다. 휘몰아치는 4악장에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더블베이스뿐만 아니라 오보에, 팀파니가 뛰어났다. 연주가 끝난 후 두다멜이 호른 연주자들을 일으켜 세웠을 때 객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말러리안’들의 듣는 귀는 비슷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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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는 서울시향과 베토벤 ‘영웅’ 연주

폴란드 출신의 안토니 비트(사진)는 1971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세계 각지에서 연주 활동을 하며 명성을 떨쳐왔다. 단정하고 정확한 지휘가 그의 특징이다. 이번에 서울시향과 함께 베토벤의 ‘영웅’에서도 그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연주 전반을 감싸 안았다. 엄청난 활력을 원했던 이는 살짝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돈된 음색의 깊이와 넓이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줬다는 점에서 안토니 비트의 명성에 값하는 연주였다.

서울시향 단원들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소콜로프와의 협주(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 35)에서는 어쩐 일인지 뛰어난 하모니를 이뤄내지 못했다. 소콜로프는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면서까지 열심히 임하는 모습이었으나 연주 투어의 강행군에 지쳐서인지 피로감이 엿보였다.

서울시향이 ‘영웅’에서 그걸 완벽하게 만회한 것은 아니지만, 관객들은 꽤 만족한 표정이었다. 안토니 비트의 정확한 디렉팅에 힘입어 대작 ‘영웅’을 무난하게 소화한 덕분이었다. 베토벤 마니아들이 잔뜩 기대한 2악장의 장송행진곡은 그다지 매끄럽지 않았으나 피날레인 4악장에서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변주를 멋지게 구현해냈다.

이번 연주에서 안토니 비트는 호른 연주가 만족스러웠는지 연주가 끝난 뒤 호른 주자들을 가장 먼저 일으켜 세웠다. 오보에와 플루트 등에 대한 그의 평가도 후했다. 관객이 듣기에는 연주 내내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비올라 주자의 생기가 돋보였다. 안토니 비트와 함께 한 ‘영웅’은 서울시향에 큰 의미로 남을 듯 싶다. 최근의 내홍을 연주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음악계 안팎에 심어줬기 때문이다.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