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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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 / 한국문학번역원장, 서울대 명예교수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 한밤중에 만나는 귀신이나 유령도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은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질 때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남에게 강요할 때라고 한다. 그걸 거부하면 적(敵)으로 간주해 주저 없이 남을 해치고 죽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무서운 것이, 바로 자기와 가장 절친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단 시글 감독의 영화 ‘신체 강탈자들의 침입’은 우리가 잠든 사이에 외계인들이 우리 가족과 친구를 데려가면서, 똑같이 생긴 복제품을 놓고 간다는 설정을 통해 정치 이데올로기의 세뇌를 비판한다. 이 영화에서 남편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그리고 아내는 믿었던 남편이 어느 날 외모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두려움에 떤다.

이 영화의 리메이크인 ‘인베이전’에서는, 남편이 이상하게 변한 것을 발견한 부인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내 남편이 내 남편이 아니에요”라고 절규한다. 1980년대 초, 선배들의 의식화 작업을 통해 반정부 운동권 투사로 변신한 서울대 학생의 한 학부모도 지도교수인 나를 찾아와 똑같은 말을 했다. “교수님, 내 딸이 내 딸이 아니에요.” 방학 때 집에 돌아온 딸은 비록 외모는 같았지만, 예전에 서울로 보낸 착하고 순진한 딸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극우나 극좌 정치 이데올로기의 세뇌는 이렇게 사람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준다.

단 시글의 또 다른 영화 ‘텔레폰’에서는 옛 소련 비밀정보국(KGB)이 세뇌시켜 미국에 심어 놓은 사람들을, 극렬분자인 전직 KGB 요원이 다시 가동시켜 테러리스트로 이용한다. 세뇌된 미국인들은 평소에는 평범하게 살다가, 옛 KGB 요원이 전화를 걸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들려주면 갑자기 최면상태가 돼 테러리스트로 돌변한다. 우리나라에도 정치 선동가들이 조용하게 살던 사람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키워드가 있다. ‘조국’ ‘민족’ ‘자주’가 바로 그것이다. 웬일인지, 그 키워드를 듣는 순간, 우리는 그만 통제력을 잃고 폭력적이 된다.

또 다른 영화 ‘패컬티’에서는 외계 생물체의 숙주가 된 교사들이 학생들마저 자신들처럼 만들려다 제자들의 반발로 실패한다. 교육 현장에서의 정치 이데올로기 교육과 세뇌를 비판하고 있는 이 영화는 교사들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시사한다. 자기가 좌파든 우파든 교사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정치 이념을 강요하면 안 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좌우 이데올로기의 장점과 단점을 다 가르쳐주고, 최종 선택은 학생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교육 현장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영화로도 제작된 리처드 콘돈의 소설 ‘맨추리언 캔디데이트’는 공산주의 이념에 세뇌된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미국인들의 은밀한 두려움을 그린 영화다. 6·25전쟁 중, 포로로 잡혀 만주로 이송된 일단의 미군이 세뇌돼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중 레이먼드 쇼는 미국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는다. 공산주의 동조자인 그의 어머니는 최면에 걸려 있는 쇼를 활성화시켜 미국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려 한다. 그렇게 되면 부통령 후보인 자기 남편이 대통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분열된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이 어느 쪽인지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부모와 자녀도 정치 이데올로기로 인해 갈라지고,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 또한 그러하며, 때로는 친구끼리도 이념 때문에 등을 돌리기도 한다. 그래서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정치 이야기를 할 때는 늘 조심스럽다. 누가 이념적으로 반대편이고, 누가 세뇌된 에이전트이며, 누가 언제라도 활성화될 수 있는 잠재적 스파이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장 가까워야 하는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를 경계하고 불신해야만 하는 상황은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만든다. 영화 ‘에이리언’이나 ‘더 씽’에서처럼 과연 우리 중 누가 몸속에 외계의 생명체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주한 미국대사를 공격한 한 극단주의자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무지한 사람의 신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전쟁의 폭력에 반대한다면서 개인에 대한 폭력은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도, 또 북한의 도발이나 전쟁 준비에는 침묵하면서 남침에 대비한 한·미 군사훈련에는 반대하고 테러를 가하는 것도 바로 무식한 자의 잘못된 신념과 그 신념의 강요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이 극우파나 극단적 종교 신봉자들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일부 극우단체의 언어폭력과 저급한 행동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지구상에서는 광신도들의 테러가 인류 문명을 위협하고 있다. 자기만 옳다고 확신하면 세상을 흑백논리로 보고, 차이를 부인하며 타자를 적대시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 사회를 무섭게 만든다.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이념의 차이로 서로를 불신하고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무섭고 불행한 사회다.

좀비는 맹목적으로 남을 공격하고 물어서 전염시키기 때문에 무섭다. 극단적 정치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냉혈 좀비로 만든다. 우리가 좀비와 다른 점은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유연성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무섭지 않은, 따뜻한 인간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