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리즘 부활… 전범자도 신화로 만들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바이에른 의용간호사협회에서 만든 엽서. 전사자를 애도하듯 그의 무덤에 손을 뻗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보인다. 기독교적 구원과 부활의 테마를 덧씌워 전장에서의 죽음을 신성화하고 있다.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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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 숭배 / 조지 L 모스 지음 ／ 오윤성 옮김 ／ 문학동네

“비로소 남자가 되었다는 황홀함을 안고 나 이렇게 홀로 당당하게 서 있다.”

독일 극작가 하인리히 체르카울렌의 희곡 ‘랑게마르크’(1937)에 등장하는 대사다. 랑게마르크는 1914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희생자가 무려 14만5000명에 달할 만큼 참혹했다. 그럼에도 희곡은 이 전장을 ‘비로소 남자가 된 황홀한 곳’ 따위로 표현하고 있다.

랑게마르크에 대한 왜곡은 이미 전투 발생 직후부터 시작됐다. 독일은 전투 다음 날 “랑게마르크 서부 청년 연대가 ‘독일이여, 가장 위대한 독일이여’를 노래하며 적의 참호 제1선을 돌격, 점령했다”고 속보를 전했다. 하지만 전투는 누구의 승리도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진 곳도 정확히는 랑게마르크에서 5㎞ 서쪽으로 떨어진 비크쇼테였다.

독일은 전투를 승리로 둔갑시키고 게르만적 명칭인 랑게마르크와 ‘독일의 노래’를 덧씌워 랑게마르크 신화를 만들었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도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죽음의 위기가 닥친 순간에 ‘독일의 노래’가 들렸던 랑게마르크 전투를 떠올리며 이렇게 전한다. “열일곱 살 소년들이 이제는 남자가 된 듯했다.”

‘전사자 숭배’는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 사례를 통해 전쟁을 미화하고, 전사자를 국가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한 역사의 기원과 진화를 살핀다. 전사자 숭배는 내셔널리즘이라는 핵심 기제라는 것이 저자 조지 L 모스의 핵심 주장이다. 그는 기존 통념을 뒤집고 “나치즘은 강제동원이 아닌 독일국민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 것”이란 연구결과를 발표한 역사학자로 잘 알려졌다.

책에 따르면 전사자에 대한 국가적 추모는 겨우 18세기 후반에 들어서 생겨난 일이다. 이전 전쟁은 왕실이 돈으로 고용한 용병대에 의해 치러졌다. 용병에게 굳이 전쟁의 목적에 공감하도록 애쓸 이유가 없었고, 전사자에 대한 예우 또한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전쟁(1792∼1799)과 독일의 대 나폴레옹 해방전쟁(1813∼1814)부터 전쟁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국민국가의 탄생과 함께 참전자는 자원입대한 의용병과 징집병이 중심이 됐다. 자연스레 전쟁은 국가의 영광과 국익을 위해 치러지는 성스러운 의식으로 올라섰고, 전사자는 고귀한 대의를 위해 희생한 영웅이란 인식이 생겼다.

국가는 이를 적극 활용·조장했다. 의용병들이 전쟁 중이나 전후에 쓴 시와 노래도 신화를 만들어내는 데 한몫했다. 저자는 이를 ‘전쟁 경험의 신화’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당시 전쟁은 애국심과 전우애로 무장한 신체 건강한 남성들이 조국을 위해 남성다움을 뿜어낼 수 있는 장소로 그려졌다. 독일 표현주의의 시조로 꼽히는 게오르크 하임조차 자신의 일기에 “전쟁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난 다시 건강해질 텐데”라고 썼다.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라 희생과 부활로서의 죽음으로 격상됐다.

신화는 특히 전사자를 위한 군사묘지, 전쟁엽서, 기념비 같은 상징물로 더욱 강화됐다. 국유화된 죽음은 국가라는 종교의 순교자로, 묘지와 전쟁기념지는 국가적 경배의 신전으로 부상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의 죽음과 부활 테마가 가미되기도 했다. 군사 묘지 중심에는 거대한 십자가가 세워지고 엽서에는 예수와 천사가 자주 등장했다.

저자는 이런 전사자 숭배가 내셔널리즘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승전국보다는 패전국이 더 위험소지가 크다. 전사자 숭배를 정치·사회적 야만화로 진화시킨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다행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전사자 숭배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전쟁기념물들은 대부분 영웅화보다 전쟁의 아픔과 공포를 기억하는 차원에서 다뤄진다.

그러나 책은 “내셔널리즘이 시민종교로 다시 한번 부흥한다면 ‘전쟁 경험의 신화’ 또한 그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일본이다. 가미카제의 영웅화,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자들을 신화로 만들어내고 있다. 죽은 자들을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불러내는 정권은 언제나 야만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