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비극’ 거대한 폭력을 이겨낸 제주 한마을의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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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아이 / 장성자 글, 김진화 그림 / 문학과지성사

부모 세대가 읽고 감동을 받았던 동화책 중에는 묵직한 주제를 다룬 이야기들이 많다. 권정생의 ‘몽실 언니’가 그랬고 절대 권력과 평범한 한 사람의 생을 극적으로 대조해 보여준 엘리너 파전의 ‘보리와 임금님’이라든가 존재의 의미를 다룬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같은 작품이 그랬다. 동화를 통해서 세계의 가려진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 삶의 진실을 추적한다는 것, 무엇보다 그 안에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문장을 만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값진 경험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평생 간직하고 싶은 구절과 문학 속의 주인공들을 성장기에 만난다.

‘모르는 아이’는 모처럼 만나는 그런 동화다. 제주도 작은 마을에서 한 어린이가 겪는 역사의 소용돌이와 가족, 친구, 이웃의 사랑이 탄탄한 필력과 세련된 문학적 구성으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연화라는 다정하면서도 당당한 주인공을 4·3이라는 비극적 기억의 한복판에서 발견해낸다. 그리고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치밀한 서사로 그 무렵의 삶을 한 장면씩 복원한다. 몽실 언니가 가족을 위한 희생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누이의 얼굴이었다면 민구의 누나 강연화는 한층 현대적이고 자립적인 여자 어린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날벼락처럼 퍼붓는 가혹한 공격 속에서 가족과 친구를 지키는 능동적인 연화의 모습은 아동문학 속 여성 인물에 대한 시각도 새롭게 바꾸어놓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작품의 배경은 마을의 초등학교 하나가 폐쇄되었던 제주의 남쪽 바닷가 마을 표선면이다. 그 학교가 1946년에 폐교했다가 1960년에 다시 개교할 때까지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해녀와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생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뭔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국가의 이름으로 삭제 봉인되었던 아픈 경험을 작가는 고스란히 되살렸다. 등장인물들의 증언은 ‘나는 모르쿠다’라고 얘기해야만 했던 감춰진 진실과 그 너머의 얼굴 하나하나를 조명하면서 더 깊은 질문 속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중산간과 바다를 오가며 펼쳐지는 섬마을 묘사와 작가가 뚝뚝 던지듯 내놓는 생생한 고향 사투리에서 평화로운 제주의 풍경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함께 절망하고 버티면서 눈물겹게 이겨내는 연화와 이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가 거대한 폭력 속에서도 어떻게 서로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작품의 제목처럼 우리들 모두는 그동안 ‘모르는 아이’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아주 조금은 ‘아는 아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커다란 서사의 고리를 함축하는 이 제목은 작품 속에서 가슴이 쿵 내려앉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콜라주 기법으로 된 김진화의 그림도 이 이야기의 바탕이 어딘가에서 있었던 일임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김지은 <어린이·청소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