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직장 쫓겨나 재보험사업…죽는 날까지 국가대표 브로커로”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만영 히스 보험중개법인 대표가 지난 5월 27일 서울 중구 YG타워 사무실에서 세계지도를 보며 한국 보험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한만영 보험중개사 히스 대표

미래는 희망일까, 절망일까. 오지 않은 시간은 가능성과 동시에 불안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마을 공동체의 ‘두레’나 ‘품앗이’를 통해 ‘불안’을 해결했지만, 산업화와 도시화로 마을 공동체를 잃어버린 현대인은 보험을 통해 ‘불안’을 해결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도 공장을 새롭게 짓거나 자원 개발에 나설 때 등에는 꼭 보험에 가입해 위험에 대비한다. 현대인에게 보험은 ‘위험’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인 셈이다.

우리나라는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들어 이제는 ‘제조 강국’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을 취급하는 ‘보험 분야’에선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다. 일반인이 아닌, 보험회사를 상대로 보험을 판매하는 재보험 시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척박한 재보험 중개시장을 개척하면서 토종 보험중개법인을 키워낸 한만영(55) 히스 대표를 지난 5월 27일 만났다. 사명인 히스는 ‘Hankook Insurance Service’의 영문 약자다. 서울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회사 회의실 정중앙에는 ‘Let’s Talk Risk(위험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란 문구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위험을 다루는 브로커(broker)’라고 소개했다.

―스스로 브로커라고 소개하는데, 나쁜 뜻 아닌가.

“내 직업을 영어로 표현하면 브로커이고, 한국어로 하면 중개인이다. 한국에서는 브로커라고 하면 불법적인 일을 하는 중개인을 연상하는데, 영미 국가에서는 브로커는 변호사와 동급으로 대우를 받는다. 전문성을 인정받는다. 반면 한국에서는 희한하게도 ‘컨설팅’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호감을 갖더라. 하지만 영미 국가에서는 ‘컨설팅’하면 사기꾼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우리나라와 정반대다. 보험은 계약이다. 자신의 위험을 계약서를 작성해 이전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험 가입 가격은 적정한지, 보상범위는 적당한지 소비자가 지식을 갖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인은 완벽한 지식을 갖추기가 힘들어서 브로커의 역할이 중요시된다. 영미 국가 등 보험업이 발전한 선진국에서는 일찍이 보험 인수인(보험사)과 보험에 가입하는 보험계약자가 직접 만나서 흥정하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고, 브로커와 같은 중간 전문가가 흥정하도록 했다.”

―보험중개업의 역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보험중개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보험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한다. 재보험이란 보험사가 인수한 보험물건 중 일정 부분을 다시 보험에 드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를 국내에 전시하려면 많게는 수천억 원대의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보험계약을 따낸 보험사로서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사고로 작품이 훼손되거나 도난을 당했을 경우, 보험사가 천문학적인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보험사가 휘청일 수 있다. 이 원수 보험사도 위험을 회피하는 차원에서 보험을 들어야 하고 이를 재보험이라고 하는데, 만약 보험사고가 발생하면 재보험금을 받아 보험계약자에게 돌려주면 된다. 거래 액수가 크기 때문에 국제적인 거래가 많은 시장이다. 이렇게 국내 보험사에 맞춤형 재보험 상품을 제공하고 세계적인 대형 보험회사와 연결해주는 역할을 바로 보험중개회사가 담당한다. 보험중개사는 보험계약자의 위험을 식별·분석·측정해 보험계약자의 위험을 가장 경제적으로, 최대한 충분하게 보장받을 수 있도록 다수의 보험사와 접촉한 후 최적의 선택을 하도록 추천한다. 보험계약자가 개인보다는 기업이 많으므로 기업보험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보험업이 발달한 영미 국가의 경우 보험중개업이 전체 보험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0~70%에 달한다. 반면 한국의 경우 보험중개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에도 미치지 못해 일반인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 현재 국내에는 우리를 포함해 130개 정도의 보험중개회사가 있다. 국내 시장은 마쉬코리아, 에이온코리아 등 외국계 회사가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지난해 말 매출액 기준으로 우리가 3위를 차지했다.”

― 원래는 외국계 회사였다고 들었는데.

“우리 회사는 원래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로이드 브로커(Lloyd’s Broker)인 히스램버트(Heath Lambert)의 한국지점으로 1999년에 설립됐다. 2002년 직장에서 쫓겨나 방황하다가 히스램버트코리아 이사로 재보험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본사가 직원들의 연금분쟁으로 휘청거리면서 한국에서 철수하려 했다. 영국에서 온 보스가 나에게 인수 의사를 물었다. 정말 많이 고민하다 6개월 동안 본사와 협상을 벌여 한국 현지법인 지분의 56%를 1억 원에 인수했다. 직원은 경리와 나를 포함해서 3명 남았는데 정말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매출이 매년 100% 이상 급증해 3명뿐이던 직원이 현재는 72명으로 늘었다. 사명은 2006년에 현재의 히스(Hankook Insurance Service)로 바꿨다. 지난해에는 800억 원을 줄 테니 회사를 넘기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1조 원을 줘도 팔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세계시장에서 성공한 한국 보험중개법인 사례로 남고 싶다.”

한 대표는 보험업계에 첫발을 내디딘 1987년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왔는데, 정외과를 나오면 취직이 잘 안 됐다(웃음). 그러다가 쌍용화재(현 흥국화재)에 1987년 9월에 붙었다. 순수하게 영업통이 돼서 회사의 임원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보험 회사 영업부는 매우 척박한 땅이었다. 업무부와 비교해 영업부는 하위 부서 취급을 받았다. 자신감이 넘쳐 상사에게 덤벼든 게 화근이 됐다. 부당한 훈계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상사에게 ‘우리 둘 다 공채다. 실력으로 이야기하자’고 말했다가 자존심을 버릴 수 없어 결국 2002년 회사를 그만뒀다. 뭐해서 먹고사나 고민하다가 보험대리점을 차리기로 했다. 원래 영업 체질이어서 몇 개월 만에 회사에서 받던 연봉의 2배 가까운 돈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늘 뭔가가 부족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운명처럼 히스램버트 한국 지점에 입사하게 됐다. 이제 보험업계에 몸담은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30년 일해보니 보험업이 좀 보인다. 보험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보험 중개업의 본질을 제대로 알리고 싶다.”

― 오랫동안 지켜봤을 텐데, 국내 보험산업의 고쳐야 할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보험상품 개발과 판매가 나뉘는 일명 ‘제판분리’를 통해 각자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업이 살아난다. 제판분리는 쉽게 말해 보험상품의 제조사와 판매사를 나눈다는 얘기다. 미국 등 선진국 시장에서는 한 보험사에 소속돼 그 보험사 상품만 파는 전속설계사 개념 자체가 없다. 보험 상품 제조는 보험사에서, 판매는 판매전문회사에서 각각 나눠서 맡는 제판분리가 일찌감치 도입됐다. 국내 보험시장은 제판분리가 안 된 유일한 나라다. 제판분리가 안 된 까닭에 기업보험 시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측면도 있다. 국내 보험사가 외형은 크게 키웠는지 모르겠지만, 외국에서 볼 때에는 생명회사인지 자동차 회사인지 구분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뒤섞여 있다.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기업보험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 글로벌 경쟁력은 어떤가?

“금융이 대한민국의 차세대 먹거리가 돼야 한다. 국내 보험업의 경쟁력은 글로벌 시장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 자동차 배터리가 나가면 어디든 1시간 내로 보험회사가 출동해 문제를 해결해주는 나라는 한국 외에 그 어디에도 없다. 산업혁명 이후 제조업을 통해 최고의 부국이 된 영국은 후발 주자들에게 제조업 1위 자리를 내줬지만, 축적된 자금을 금융 산업에 투자해 금융 강대국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도 영국처럼 포스트 제조업을 키워야 한다. 무엇보다 재보험 중개업 분야는 성장 가능성이 크다. 재보험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전제로 한다. 한국 리스크를 해외로 내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해외 리스크를 한국으로 끌어들이기도 하는 글로벌 비즈니스다. 한국은 석유화학과 조선업이 세계적 수준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기업이 공장을 세우거나 조선소를 만들 때 리스크 분석을 해낼 수 없어서 리스크요율 분석을 위해 해외 보험사에 의뢰하는 상황이다. 제조업에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지만 재보험으로 외국에 돈을 퍼주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는 조선소가 없지만, 조선소의 위험을 분석하는 보험사들이 있다. 재보험사와 중개업체들이 분발해야 한다. 보험은 결국 리스크다. 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정확히 리스크를 분석하고 전이시킬 것인가, 그 싸움이다. ‘Let’s talk risk!’ 보험은 리스크가 전부다.”

업계에서 ‘국가대표 브로커’로 알려진 한 대표는 사실 국내보다 해외 재보험 시장에서 더 유명한 인사다. 수완과 실력으로 글로벌 업체와 경쟁하며 업계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그의 별명은 ‘Hat Guy(모자 쓴 남자)’다. 한 대표의 머리숱이 자꾸 빠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아내가 계절마다 모자를 사다 줘 쓰기 시작했는데, 모자가 한 대표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이다. 해외 미팅이나 콘퍼런스 현장에서 외국 경영자들은 한 대표의 이름은 몰라도 ‘한국에서 온 hat guy’ 하면 다 알 정도다.

“해외 유명보험사들도 이제는 우리한테 재보험 계약을 의뢰해오고 있다. 금융업은 미국·영국에서만 하는 사업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 세계 재보험시장의 중심인 런던으로 진출하는 날까지 열심히 뛸 계획이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 또래 세대는 국가와 후손에 대한 걱정과 의무감이 강하다. 10년 뒤 대한민국이 무엇으로 먹고 살아갈지 걱정이다. 내가 생각하는 해답은 금융업이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만큼 대한민국과 나의 자녀세대가 빛을 볼 것이란 생각으로, 죽는 날까지 제대로 된 보험중개업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박정경 기자 verit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