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녹슨 철문집·나지막한 한옥·좁은 골목길… 西村은 추억이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지인 서울 종로구 누상동 주택가 골목길. 이 골목길은 영화에서 대학 교수가 내준 ‘자신의 집 주변을 둘러보고 사진을 남기라’는 과제를 하기 위해 동네를 배회하던 서연(수지)이 우연히 승민(이제훈)과 만나 함께 걷는 장면에 등장한다. 신창섭 기자 blue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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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건축학개론’ 제작자인 심재명(아래) 명필름 대표가 승민과 서연이 아릿한 감정을 처음 느끼는 장면(위)을 촬영한 서촌 한옥집 그 자리에 앉아 촬영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1) 심재명의 ‘건축학개론’ 촬영지

예술작품은 등장인물과 함께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가가, 감독이 작품 속에 설정했던 그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이는 독자나 관객에게 추억의 공간으로 남게 됩니다. 문학은 물론 영화와 연극·뮤지컬·춤 등 예술작품 속 공간을 찾아갈 겁니다. 작가가 가기도 하고, 연출자가, 배우가, 춤꾼이, 제작자가 찾아가기도 합니다. ‘신(新)풍물기행’의 후속으로 이번 주부터 매주 금요일 연재되는 ‘명작의 공간’은 독자들을 추억의 공간으로 안내합니다.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명필름이 보낸 시간이 8년이 넘었다.

서초구 반포동에서 3년을 보냈던 MK픽처스 살림을 정리하고 종로구 필운동으로 옮긴 것이 2007년이다. 다른 영화사와 MK픽처스란 이름으로 합쳤던지라 그만큼 사람도, 일도 많았던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명필름 이름을 되찾고 살림을 줄여 50년이 넘은 2층 양옥집에 새 간판을 달았다. 100평이 넘는 대지에 1, 2층을 합치면 80평쯤 되는 공간도 쓸모가 있었고, 마당엔 수십 년이 넘은 목련 나무도 있었다. 크기와 쓸모에 비해 세도 쌌다. 회사는 줄곧 종로구 운니동, 명륜동, 혜화동을 옮겨 다녔으니 2007년의 이사는 강북으로의 회귀인 셈이기도 했다.

경복궁 옆, 그러니까 필운동, 적선동, 체부동, 누하동, 누상동, 통인동, 옥인동 등 구도심답게 작은 동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서촌은 서울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낮은 건물들과 작은 한옥들 사이로 좁은 길들이 연이어 붙어있는 풍경이 예스러운 곳이었다. 사무실의 목련 나무가 만개하면 마당 하늘을 뒤덮을 듯했고 다투어 조팝나무, 산수유, 사과나무 꽃이 피었다. 또 사무실 앞 필운동에서 누하동, 옥인동을 잇는 큰 길가에는 4월이면 벚꽃들이 일제히 피어났다. 활짝 핀 벚꽃 빛이 얼마나 밝은지 밤에도 거리가 환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언제나 그렇듯 사무실 근처로 살림집까지 옮긴 나는 아침이면 사직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필운동 사무실에서 일을 한 후 누하동 집으로 퇴근했다. 늦은 밤 경복궁 영추문 길로 반려견 라라의 산책을 시키면 하루가 끝났다. 주말이면 옥인동 수성계곡을 타고 인왕산에 올라 부암동 쪽으로 걸었다. 통인시장의 기름떡볶이집과 손만두집, 정육점과 반찬가게도 단골이 되었다. 체부동 쪽 금천시장의 국수집과 술집들도 친구나 지인들이 오면 몰려가는 곳이 되었다.

서촌에 머문 8년 동안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파주’, ‘시라노:연애조작단’, ‘마당을 나온 암탉’, ‘건축학개론’, ‘관능의 법칙’, ‘카트’, ‘화장’ 등 13편의 영화를 만들고 개봉했다. 작품 수로 보면 정신없이 바빴다는 게 맞는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서촌의 시간’은 여유롭게 느껴진다.

그중 ‘건축학개론’은 서촌과 인연이 각별한 작품이다. 96학번 대학 새내기 승민(이제훈)은 건축학개론 수업 시간에 처음 만난 음대생 서연(수지)에게 한눈에 반한다. “습관적으로 매일 지나치는 동네 건물들, 집들을 유심히 한 번 봐봐. 살고 있는 곳에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하는 것이 바로 건축학개론의 시작이야. 알았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교수의 이 수업 이후 둘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정릉의 곳곳을 걸으며 숙제를 함께한다. 서연이 찾아낸 비밀 아지트 같은 정릉의 빈집에서 둘은 서로 말을 놓은 후 화분에 꽃을 심고, 물을 주며 감정을 키워간다. 그러면서도 승민은 첫사랑인 서연이 정작 ‘강남오빠’ 재욱(유연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낙심한다. 첫눈 오던 날 그 빈집에서 만나기로 한 두 사람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한다. 화장을 예쁘게 하고 화사한 겨울 코트를 입은 서연이 밤늦도록 마루에 앉아 오지 않는 승민을 기다리다가 조금 빨개진 눈빛으로 그리고 추위에 언 손으로 승민에게 줄 CD플레이어를 두고 나가는 모습이 빈집의 마지막 장면이다.

정릉 토박이 승민과 제주도 출신 서연이 함께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빈집을 정릉에서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미 반복되는 재개발로 높은 아파트들과 건물들이 들어선 곳에서 1990년대 모습을 재현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연출자인 이용주 감독을 비롯한 연출·제작팀은 정릉 대신 아직 예스러운 풍경이 남아있는 서촌에서 촬영했다.

승민과 엄마가 30년을 넘게 산 정릉집도 마찬가지다. 배화여고 올라가는 길가에 붙어 있는 골목 중간쯤의 오래된 단층집을 모자의 정릉집으로 정했다. 엄마의 돈 걱정과 잔소리로 기억되는 낡은 이 집이 싫었던 승민은 15년이 지나 약혼녀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엄마와 마주한다. 엄마는 여전히 까만 비닐봉지에 든 먹을 것들로 복잡한 냉장고를 정리하며 승민이 버렸던 ‘짝퉁’ 게스 티셔츠를 입은 채 말한다. “집이 지겨운 게 어딨어. 집은 그냥 집이지. 이렇게 나이 먹고 보니 다 그냥 추억이야”. 늦은 밤, 15년 전 엄마의 잔소리와 자신의 가난이 싫어 화가 나 힘껏 발로 차 찌그러뜨린 낡은 철 대문의 한 귀퉁이를 펴보려고 애쓰던 승민은 집 앞 계단에 앉아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해서 서촌의 한옥집과 거리, 골목이 ‘건축학개론’에 담겼다. 1996년이라고 해도 그럴싸한 모습, 그리고 15년이 흘러도 별로 변하지 않은 승민의 공간들을 담기에 서촌은 맞춤한 곳이었다.

‘건축학개론’이 개봉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서촌은 그 3년 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모습이 바뀌고 있다. 수없이 많은 카페가 들어섰고, 공방이 생겼고, 맛집들이 문을 열었다. 이제 주말이면 수성계곡에서 이어지는 옥인동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깨와 어깨를 부딪칠 지경이다. 금천시장의 술집과 식당들은 여름 해가 지기도 전에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곳은 서촌안내서나 지도를 들고 찾아오는 외부인들로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8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내가 새로 들인 습관은 되도록 걸어 다니는 것이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을 눈앞에 두고 있는 곳이지만 볼 곳, 갈 곳이 많은 이곳은 자동차로 지나치기에는 세심하게 살필 것들이 많기도 하다. 누하동 집에서 효자동과 경복궁 앞을 지나면 어느덧 북촌 어귀이고, 필운동 사무실에서 옥인동 단골 밥집이나 빵집에 들르는 참에 정선의 ‘수성계곡’을 그대로 복원한 수성계곡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다. 동네 구석구석을 주로 걸어 다니다 보니 서촌의 역사도 알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웃대’라고 불렸던 서촌은 워낙 많은 유적과 그 흔적들이 흩뿌려져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오래된 서울’(김창희·최종현 지음)이라는 책에 보면 서촌은 조선 초기에는 왕족들의 터전으로, 중기부터는 사대부들이 살던 곳이자 서인 학문과 예술의 발상지로, 후기에는 중인들의 문예운동이 꽃피웠던 곳이라고 한다. 윤덕영, 이완용 등 친일파들이 누렸던 어마어마하게 큰 저택은 역사의 상처다. 서촌에는 지금도 그리운 문인, 예술인들이 정말 많이 살았다. 정선과 김정희의 작품들에 서촌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직동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통인동 154-10에 살던 큰아버지에게 입양돼 스물 두 해를 서촌에서 살았던 천재시인 이상이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1941년 5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옥인제일교회 인근 누상동 9번지에서 하숙했던 윤동주 시인은 그 시절에 6편의 시를 썼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7월에 누상동 166-202의 2층 집에 세를 얻어 들어온 화가 이중섭은 이곳에서 ‘길 떠나는 가족’이란 연작시리즈이자 대표작 중의 하나를 남겼다. 이중섭의 셋집과 윤동주의 하숙집 거리가 100m 남짓 떨어진 정도라니 참 의미심장하다. 윤동주는 1945년 옥사했고, 이중섭은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사망했으니 그들의 시간은 겹치지 않았다. 그들을 그리워하는 우리가 그들을 함께 기억할 뿐이다. 역사의 격랑 그 한가운데 있었던 김수임과 노천명 등의 여성들도 체부동과 옥인동, 누하동에서 살았다.

동네 곳곳의 표석을 살피고 역사의 기록에 남아 있는 주소지를 확인하고 쓸쓸하게 남아있는 기둥을 발견하며 서촌을 거쳐 간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은 내가 사는 이곳이 어떤 의미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소중한 기회다.

얼마 전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경기도 양수리에 살던 열다섯 소녀 시절의 엄마가 서울로 유학 와 통인동에 혼자 머물렀었다는 것을 외삼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됐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나는 ‘엄마는 어느 골목에서 한숨을 쉬고 미소를 지었을까. 외할아버지의 지인 집에 혼자 머물며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면서 엄마의 엄마도 보고 싶었겠지. 엄마의 운동화가 밟았을 그 길 위로 나는 또 내 발자국을 매일 남긴다…’라고 얼마 전 낸 책(엄마 에필로그)에 썼다. 그리운 사람들이 걷던 길을 나는 매일 또 걷는 것이다.

명필름은 얼마 전 8년의 서촌 생활을 마치고 파주로 이사했다. 파주출판도시 문발동에 새 사옥을 짓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서촌의 살림집도 곧 옮겨갈 예정이다. 나는 서촌 시절을 마감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낮은 담벼락, 작은 집, 좁은 골목을 비추는 햇볕처럼 따뜻하고 정감 있어 좋았다. 많은 일이 있었고 벅찬 기쁨과 가슴 아픈 슬픔도 있었다. 그래도 감사한 나날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변해가는 지금의 서촌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모쪼록 행복하길 바란다.

명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