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한국어 자신있었는데 … 대구로 유학와 사투리 안들려 좌절”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세르게이 교수가 지난 7월 30일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 국제진료센터에서 카자흐스탄 환자에게 선물 받은 전통 모자를 양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김세르게이 분당서울대병원 국제진료센터 교수

최근 국내 의료계의 큰 화두는 해외환자 유치다.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앞다퉈 국제진료소를 설치하면서 해외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국내의 의료수준을 외국에 알린다는 명분도 있지만, 의료비 저수가로 인해 국내 환자만 진료해서는 병원의 수익구조를 개선할 수 없다는 인식이 의료계에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의료기관들이 해외로 진출하는 것도 해외환자를 국내로 유치해 진료하도록 하겠다는 목표가 배경에 있을 정도다. 이처럼 의료기관들이 해외환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그동안 중국인이 대부분이었던 외국인 환자들도 다양해지고 있다. 중동은 물론 최근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독립국가연합(CIS)의 환자들이 우리나라를 찾고 있다. 외국인 환자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외국어는 물론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의료진의 중요성이 커졌다. 분당서울대병원 국제진료센터의 김세르게이 교수는 이 같은 한국의 의료상황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 4세인 그는 우리말은 물론 영어와 러시아어, 카자흐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데다 의학 공부를 한 의사다. 한국사람과 똑같은 외모를 지닌 그가 어린 시절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전혀 몰랐으며, 한국을 처음 방문한 시점도 정규 대학과정을 마친 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특히 러시아에서 의대를 졸업한 그가 도제식 시스템으로 이뤄진 국내 의료계에서 이례적으로 대학병원 교수로 근무하게 된 점도 궁금했다. 지난 7월 30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 만난 그는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자신이 한국에 오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한국어가 어색하지 않습니다.

“독학으로 배웠습니다. 고려인 4세이지만 처음에는 한국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카자흐스탄에 살면서도 나는 고향인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연히 우즈베키스탄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국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때부터 입니다. 우즈베키스탄 역사책을 보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너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을 뿐이지 네 핏줄은 한국’이라고 말씀해주신 것이 계기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으로만 알고 있던 저에게는 당시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련에는 남한보다 북한이 더 많이 알려졌었습니다. 노동신문, 지금은 고려일보로 바뀐 ‘레닌기치’ 같은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면서 한글에 대한 흥미도 생겼습니다. 당시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덕분에 고려인들은 학교에서 한국어도 배울 수 있었죠.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어난 건 대학에 들어가서였습니다. 1990년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 이후 한국 유학생들과 많이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가 늘었습니다.”

―의사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제가 6세 때 폐렴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병원을 찾았더니 늑막염으로 악화됐다면서 하루만 더 늦게 찾았다면 죽었을 거라고 했죠. 그때부터 병원에서 3개월 동안 치료받으면서 의사가 돼야겠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생각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왕 의대는 최고의 의대를 가겠다고 생각해 카자흐스탄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당시 소련에서 가장 좋은 의대로 평가받았던 사관의과대학을 목표로 삼고 그 대학이 있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습니다. 3일하고도 반나절 동안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레닌그라드에 가서 입학 신청서를 냈는데 입학불가 통보를 받았습니다. ‘평발’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충격이었죠. 집에서는 다시 돌아오라 했지만 그러기 싫었습니다. 당시 여름철이어서 기차표가 없기도 했지만 꿈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다른 의대의 기회가 남아있었습니다. 전국의 모든 대학의 입학시험이 같은 날에 치러지지만 유일하게 사관의과대학만 입학시험이 3일 빨랐기 때문입니다. 마침 레닌그라드에는 또 다른 의과대학이 3곳 있었고 그중에 제1레닌그라드 의과대학(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의대)에 지원해 합격했습니다.”

제1레닌그라드 의대는 러시아권 3대 명문 의대로 꼽히는 곳이며, 의대병원은 과거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총상을 치료한 곳으로 유명하다. 1988년 당시 카자흐스탄에서 제1레닌그라드 의과대학에 입학한 학생은 김 교수가 유일했다.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요.

“러시아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내과 인턴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당시에 한국의 대구 계명대의 신일희 총장님이 레닌그라드대에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러 오셨는데요. 제가 우연히 통역을 맡게 됐습니다. 통역을 한 덕에 신 총장님의 공식일정을 수행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 드렸죠. 총장님께서 제 통역이 마음에 드셨는지 일정이 끝난 뒤에 유학을 제의해주셨습니다. 계명대에도 의대가 있고 동산의료원이 있으니 한국에서 공부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인사치레로 알았습니다. 통역을 그전에도 해봤지만 보통 많은 분이 그렇게 말은 하셨거든요. 그런데 몇 개월 후에 계명대에서 제 이력서를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고, 그 뒤에 초청장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 온 것이 1997년이었습니다. 1994년에 재외동포 고국 방문 프로그램으로 2주 정도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유학생활은 전혀 달랐습니다.”

―무엇이 다르던가요.

“한국에 오기 전에 러시아에서는 어느 정도 한국말을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대구에 처음 도착하는 날 완전히 바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투리 때문이었죠. 러시아에서도 사투리를 알고 들어보기도 했는데 현지는 정말 달랐습니다. 의사선생님들과 이야기하면 그나마 이해가 가능했지만 회진을 돌거나, 콘퍼런스에 가면 발표내용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대구에서 초반 3개월 동안 몸무게가 15㎏이나 빠졌습니다. 처음에는 병인 줄 알았는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게 뭐지 싶고, 다 접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3개월 정도 지나니까 귀에 사투리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김 교수는 2001년 계명대 대학원에서 4년간에 걸쳐 순환기내과 분야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우리나라에서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서는 의사면허가 있어야 하는 탓에 의사 면허 시험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그가 박사학위를 취득하던 해 의사국가시험 문제지에 한글과 함께 있던 영어설명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어 지문으로 시험을 준비했던 김 교수는 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면허가 없으면 진료현장에 나갈 수가 없었을 텐데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한국에 남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에 불었던 벤처 붐이 저를 잡았습니다. 2002년에 한국과 러시아가 합작한 의료기기 벤처회사에 책임연구원으로 취직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러시아어도 하고, 한국어도 하고 의학적 지식도 있는 저 같은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2005년 한국전기연구원이 러시아와 과학센터를 만들면서 이직을 제안해와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선임연구원으로서 의료기기 개발에 집중했습니다. 2010년 귀화시험도 통과하면서 그렇게 몇 년 동안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아’ ‘나 지금 뭐 하고 있지’하는 생각들이 계속 들었습니다. 의사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 목표를 위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김 교수의 운명은 통역을 통해 또 한 번 바뀌었다. 의료기기 정보를 얻기 위해 참석한 대학광역학학회에서 학회 이사였던 전상훈 흉부외과 교수(당시 분당서울대병원 홍보실장·현 기획조정실장)와 알게 됐고, 그를 통해 분당서울대병원을 방문한 카자흐스탄 보건부 차관의 통역을 담당했다. 통역을 통해 의사로서의 경험과 능숙한 언어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얼마 뒤 분당서울대병원이 새로 만드는 외국인 진료센터의 외국인 환자 진료 전담 교수로 스카우트됐다.

―지금은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신가요.

“우리 병원에 오는 모든 외국인 환자들의 진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오는 외국인 환자를 초진해서 어느 과에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지 판단한 뒤에 전문과 교수님께 연결해드리는 역할입니다. 외국인 환자에게 의학적 지식 없이 통역하게 되면 전문용어가 많아 잘못된 정보가 전달될 수 있는데 그런 것을 제가 방지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러시아 환자도 많지만, 카자흐스탄 환자도 많습니다. 제가 러시아말은 물론 카자흐스탄 언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분당서울대병원의 의료수준이 세계적이라는 점입니다. 세계적으로 복강경 최소침습수술 등이 널리 알려져 해외환자들이 많이 알고 찾아옵니다. 그런 면에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일하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 국제진료센터가 더 잘되고, 한국의 의료수준이 세계적으로 잘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인으로서, 고려인으로서 한국인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국사람들은 ‘한국적인 것’에 대해 뒷전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한국에 갈 수 있다고 했을 때는 한국에 가면 정말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서 보니 정말 한국적인 것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는 쉽게 배울 수 있지만, 해금이나 피리는 배울 데가 없습니다. 공연도 전통공연을 보고 싶은데 아예 없어요. 요즘이야 한류다 해서 한복과 한옥을 접할 기회가 조금씩 생기는데 아직도 젊은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자기 뿌리, 문화는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국민들이 재미 교포에 비해 재중 교포나 재러 교포에 대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선입견과 차별도 선진국민이 되려면 버려야 되지 않을까요.”

이용권 기자 freeus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