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위안부 뮤지컬 함께 본 유엔 간부들, 충격 받고 눈물 흘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오준 주유엔 한국 대표부 대사가 지난 14일 미국 뉴욕 맨해튼 주유엔 한국 대표부 접견실에서 유엔의 외교 현장에서 겪은 얘기를 하고 있다. 외교관 생활이 올해로 37년째인 그는 외교부의 대표적인 다자외교 전문가로 꼽힌다. 신보영 특파원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6월 22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더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코리아 소사이어티 연례 만찬에서 오준(왼쪽) 주유엔 대사가 유엔 주재 각국 대사 6명으로 구성된 유엔 록스의 드럼 주자로 연주를 하고 있다. 문화일보 자료사진

한국인 최초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의장 오준 駐유엔 대사

지난 14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날씨는 32도에 육박했다. 주유엔 한국 대표부가 위치한 45번가 1번 애비뉴는 숙소인 8번 애비뉴에서 꽤 멀었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면서 도착한 한국 대표부는 1945년 창설된 유엔 건물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건물 2층 접견실 창문 밖으로는 이스트 리버를 배경으로 유엔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오는 9월 창립 70주년을 맞이하는 유엔, 그리고 저 건물 38층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엔 수장에 오른 반기문 사무총장이 포스트 2015 정상회의를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빠져 있는데, 오준(60) 주유엔 대표부 대사가 별다른 기척도 없이 접견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 대사는 한국 유엔 외교의 대표이자, 4차례 유엔에서 근무한 한국 유엔 외교사의 산 증인이다. 이시영 전 유엔 대사와 동률이라지만, 1991년 한국의 유엔 가입 이후 역사는 오 대사가 더 정통하다. 오 대사 본인도 “유엔 대표부에 근무하지 않을 때에도 외교부에서 유엔 과장도 하고, 국제기구정책관도 하고, 다자외교조정관도 해서 사실 외교관 생활의 3분의 2 이상을 다자외교를 했다”고 소개했다.

오 대사가 1985년 2등 서기관으로 처음 유엔 근무를 한 이후 30년. 그 사이 한국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할 정도로 국력이 급성장했다. 한국의 위상도 크게 올랐고, 국제질서 역시 급변한 30년이었다. 과연 뭐가 달라졌을까.

“한마디로 격세지감이에요. 처음 유엔에 왔을 때는 우리나라가 유엔 회원국도 아니었죠. 1991년 유엔에 가입한 뒤에도 국력 수준이 유엔에서 10번째, 20번째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죠. 분명 격세지감이 드는데, 가장 큰 요인은 우리 국력의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유엔처럼 193개국이 다 모여서 외교를 하는 곳에서는 어떤 나라가 어떤 정도의 국력을 가지고 있느냐가 직접적인 영향력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오 대사의 ‘격세지감’ 느낌은 지난 7월 24일 한국인 최초의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의장 취임사에서도 그대로 묻어났다. 이른바 ‘두 도시 이야기’. 항상 먹을 음식을 구하는 것에 집중하는 A 도시와 주식투자·성인병을 고민하는 B 도시. 당시 오 대사는 전혀 달라 보이는 이 두 도시에 “각각 반반씩 살았다고 할 수 있는데, 제가 살던 도시가 A에서 B로 바뀌었다”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에 따른 변화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면서 동료 외교관들의 찬사를 받았다. 외교관으로는 드물게 진정성이 느껴지는 소통 능력, 오 대사가 갖고 있는 최대 장점이다. 지난해 12월 2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북한 인권 결의안을 정식 의제로 상정하면서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은 아무나가 아니다”는 연설로 서맨사 파워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울렸던 힘이기도 했다. 절대 감정이 격해지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면서도 핵심을 짚으면서 상대를 설득하는 ‘내공’이 단단히 느껴졌다.

오 대사는 유튜브까지 올라가면서 각광을 받은 그 연설에 대해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서 마지막 회의가 월요일에 열렸는데, 우리가 다른 나라와 똑같이 북한 인권 상황이 열악하고 개선해야 하며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는 기본적 입장만 이야기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른 대표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야겠다, 그래서 발언문에 추가해서 발언문 없이 3분을 더 이야기한 것인데 국내에서 그렇게 이슈가 될 줄은 몰랐죠”라고 머쓱해했다.

사실 오 대사가 원고에도 없던 발언을 즉석에서 했던 것은 바로 “한국 외교관의 역사적 부담이자 과제”인 북한 때문이었다. 오 대사가 아프리카 말리와 수단, 소말리아까지 직접 찾아가면서 한국 유엔 외교의 지평을 글로벌 현안으로 확대하려고 노력했는데, 정작 한국의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임기(2013~2014년)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북한이었다. 처음으로 한국이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활동했던 1996~1997년은 냉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유엔 외교가 북한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17년이 지난 뒤에도 북한이 여전히 한국의 유엔 외교에서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임인 김숙 대사가 2013년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임기를 시작하고 2개월 동안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문제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다 할 정도로 바쁘게 보냈죠. 그 이후에는 북한 문제가 특별히 두드러진 적이 없었는데, 우리의 비상임이사국 임기가 끝나는 날인 지난해 12월 22일 북한 인권 문제가 안보리에 올라왔습니다. 안보리에 인권 문제가 올라온 곳은 짐바브웨와 미얀마, 그리고 북한까지 역사상 3개 나라밖에 없습니다. 그걸 놓고 생각해보니, 북한이 우리 역사의 질곡이지만 우리가 해결해야만 하는 역사적 부담이자 과제라고 누군가 상기시켜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서 북한 문제로 시작해서 북한 문제로 끝났던 거죠. 그래서 원고에 없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오 대사로서는 부임 이후 2년 동안 안보리에 북한 인권 문제를 상정시켰고 유엔 총회의 북한 인권 결의안 채택을 만들어내는 성과를 이룬 셈이니, 한국 외교사에 족적을 남겼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오 대사는 본인만이 갖는 진정성 있는 설득력이라는 장점을 또 다른 영역에도 쏟아붓고 있었다. 바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였다. 공교롭게도 인터뷰 당일은 광복 70주년을 하루 앞둔 14일. 게다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전후 70주년 담화를 통해 내놓은 과거형 사죄가 국내에서 커다란 반발을 일으키고 있는 시점이었다. 매우 껄끄러운 순간이었겠지만, 오 대사는 양자외교는 외교부 몫으로 맡기면서도 다자외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의견을 내놓았다. 영화 ‘와호장룡’에 나오는 연검, 즉 부드러운 칼 속에 숨어있는 강단이 순간 번쩍이는 느낌이었다.

“위안부 문제는 사죄나 배상 문제 같은 한·일 양자적으로 해결할 부분이 있고, 그다음에 유엔이나 국제사회 차원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기억되고 어떻게 다음 세대를 위한 교훈을 줘야 할 것이냐는 측면이 있습니다. 저는 후자를 유엔에서 다루는데, 이미 유엔에서는 1996년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8년 맥두걸 보고서에서 위안부 문제를 인권 침해라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맥두걸 보고서는 반인권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라고 규정하고, 일본이 인정하고 사죄하고 배상해야 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람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내용이 전부 다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 자신의 인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문제는 국제적으로 이미 정리가 돼 있고 유엔에서도 매년 홀로코스트 추모일이 지정돼 있죠. 이게 가능한 이유는 독일이 인정했기 때문이죠. 전쟁에는 민간인 살상이 불행히도 항상 수반되지만, 홀로코스트 문제가 특별히 부각된 이유는 그 규모나 방법이 도를 넘었다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전시 성폭력의 문제도 모든 전쟁에서 이뤄졌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군이, 일본 정부가 제도적으로 점령기에 어린 여성들을 강제로 성노예로 만들었고, 20만 명이 넘는 많은 희생자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다른 전시 성폭력 문제와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일본이 인정하는 것이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기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디어는 실질적인 행동을 만나야 빛을 발한다. 오 대사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딱 그랬다. 지난해 1월 안보리 공개토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한 데 이어, 지난 4일에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열린 뮤지컬 ‘위안부(Comfort Women)’ 공연에 자이납 하와 방구라 분쟁지역 성폭력 문제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표와 크리스티나 갈라치 공보담당 사무차장 등을 초청한 것. ‘역사 알리기’ 차원의 공공외교였다.

“그날 유엔의 사무차장급 3명을 포함해서 10명 정도가 같이 뮤지컬을 봤는데 굉장히 충격을 받으시더라고요. 옆에 앉은 분은 중간에 울었어요. 그러면서 저에게 ‘위안부라는 것이 2차 대전 중에 있었다는 사실은 지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어떤 여성들을 어떤 방식으로 데리고 가서 어떤 생활을 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출연한 배우들도 600명을 오디션을 봐서 뽑았는데, 한국계 미국인뿐 아니라 의외로 일본계 미국인들도 많이 왔다고 하더군요. 위안부가 잘못됐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죠.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하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식의 해결이 필요하다면 우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으니 전 세계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홀로코스트 문제에 있어서 안네 프랑크 일기나, 쉰들러 리스트 같은 영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듯이 우리도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오 대사는 문화외교를 포함한 공공외교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추세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사실 그는 외교부 내에서도 문화 부문에서는 독보적 존재다. 서울대 불문학과 재학 당시 이미 밴드 ‘스타피시’의 드럼 연주자였고, 2004년 외교부 음악동호회를 결성해 매년 자선음악회를 개최했다. 지난 6월 22일에는 유엔 최초로 대사 6명으로 구성된 밴드 ‘유엔 록스(UN Rocks)’ 공연에서 드럼을 연주했다. 그림 실력도 탁월해 매년 본인이 직접 그린 연하장을 지인들에게 보낸다. 오 대사는 “모범생에서 벗어나 반항하려고 시작했다”는 드럼 연주였지만, 이게 37년 외교관 생활에서 의외의 빛을 발하고 있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 오 대사는 유엔과 다자주의의 미래 역시 이 ‘조화’에 있다고 봤다. 오 대사는 “저는 유엔과 다자주의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유엔의 능력·권한을 확대해 나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국가 주권의 문제와 국제적인 협력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문제를 풀어야죠. 이상과 현실의 조화가 필요합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바탕은 열린 마음이다. “후배들이나 젊은이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이 열린 마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가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고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역할을 하려면 열린 마음으로 다른 나라, 다른 종교, 다른 인종들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세계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역할을 하겠다는 마음가짐, 이게 이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화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뉴욕 = 신보영 특파원 boyoung22@munhwa.com


◇오준 주유엔 대표부 대사

△1955년 서울 출생 △경기고 △서울대 불문학과 △미국 스탠퍼드대 국제정책학 석사 △제12회 외무고시 △주유엔 대표부 2등 서기관 △외교부 국제연합정책과장 △주말레이시아 참사관 △유엔총회 의장 보좌관 △주브라질 공사 △외교부 국제기구정책관 △주유엔 차석대사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 △주싱가포르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