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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15년 08월 28일(金)
눈으로 듣는 문호의 말… 작품을 發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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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력을 잃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비서 마리아 코다마의 부축을 받으며 걷고 있다. 둘은 보르헤스가 죽기 두 달 전 결혼한다. 마음산책 제공
보르헤스의 말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인생은 짧아요. 나는 여든 살이고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이예요. 그러니 어서 질문하세요.”

1980년 4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에서 진행된 인터뷰. 아르헨티나 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청중에게 질문 여부를 묻는 사회자의 말에 이런 농담을 덧붙였다. 1955년부터 집안 내력으로 눈이 멀기 시작한 그는 인터뷰 당시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본래 다작(多作)하는 작가도 아니었지만, 실명 이후 문자를 기록하는 활동은 더욱 더뎠다. 대신 말이 부족한 글 양을 보충했다. 인터뷰와 청중과의 문답은 그의 문학 정신과 사상을 담는 또 하나의 그릇이 됐다. “군중이라는 것은 환상이에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1980년 미 보스턴대에서 진행한 인터뷰)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음에도 영국 출신 할머니와 가정 교사의 영향으로 모국어인 스페인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웠다. 월트 휘트먼, 로버트 프로스트, 에밀리 디킨슨 등 영미권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성장했고 이후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섭렵하면서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작품이 현학적이고 난해하다는 말이 나오지만, 20세기 중후반의 사상계는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 철학자가 보르헤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움베르토 에코 또한 “만약 보르헤스가 없었다면 ‘장미의 이름’을 쓸 수 있었을까 스스로 자문해 보기도 한다”고 했다. 그의 작품을 국내에 집중적으로 소개한 고 황병하 씨는 “서구 문학은 모두 그의 ‘허구적 예언’으로부터 추출한 기호학, 상호텍스트성, 해체주의, 환상적 사실주의, 독자 반응 이론, 마술적 사실주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세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갔다”고 했다.

책에 실린 열한 개의 인터뷰 꼭지는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인터뷰가 이뤄진 1976∼1980년, 여든에 이른 대가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생각과 배움의 단초가 된다. 말년에 그의 곁에서 말동무를 자처한 윌리스 반스톤 인디애나대 비교문학 교수는 인터뷰를 정리하며 자신을 소크라테스의 말을 받아적던 플라톤에 비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뷰 중간중간 탄복할 만한 우문현답이 이어진다. “당신이 가본 적 없는 어떤 곳으로의 여행에 우리를 초대해주셨으면 한다”는 청중의 요청에 보르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하나의 장소가 과거라고 말하고 싶군요. 과거는 우리의 보물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과거뿐이고, 과거는 우리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는 작품을 쓴다는 말 대신 “작품이 나에게로 온다”는 표현을 즐겨 한다. 어떤 주제를 내세우거나 일부러 찾은 적 없이 그것이 어느 순간 자신을 사로잡고, 거기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을 글로 쓰는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책을 낸 다음에는 다시 책을 들춰보지 않고, 서재에 단 한 권도 남겨두지 않는다. “나는 죽음을 탐낸답니다. 나는 죽음을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는 희망으로 생각하는데, 그 점이 의지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저 사라질 뿐이고 그래야 하는 거예요.”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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