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기업가를 절망케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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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평 / 논설위원

기업 공격을 주력 노선으로 삼던 유럽 좌파 정당들이 변했다.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마뉘엘 발스 총리는 지난 8월 30일 “기업들에 더 많은 유연성을 줘야 한다”며 경직된 노동법을 전면 개정하겠다고 했다. 사회당 전당대회에서다. 투자은행 출신의 37세 에마뉘엘 마크롱 경제장관은 기업인들 앞에서 “그동안 기업에 맞서야 진정한 좌파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고백했다. 영국 노동당 대표를 지낸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5월 노동당이 총선에서 참패하자 “정권을 탈환할 방법은 기업 친화적 정책을 내놓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핀란드에선 기업가 출신 유하 시필레 총리가 노동비용을 5% 깎겠다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8월 30일 고향 거제를 찾아 대우조선해양 노조와 간담회를 가졌다. 올 2분기에만 3조 원 이상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대우조선은 고강도 구조조정을 예고한 상태다. 문 대표는 위기의 원인으로 경영상의 과오와 조선정책 실패를 꼽고 “고통을 노동자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물론 경영 실책도 없진 않았지만 조선 불황은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현상이다. 지금 절박한 것은 벼랑 끝에 몰린 회사를 살려내는 일이다. 야당 대표의 한마디는 쇄신 카드를 빼 든 경영진에 족쇄가 될 수 있다. 정작 노조의 보호를 받는 생산직 조합원은 구조조정 태풍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우조선을 포함한 조선업계 노조는 오는 9일 공동 파업에 나선다. 지난해 3조2000억 원 적자, 올 2분기까지 7분기 연속 적자를 낸 현대중공업에서는 벌써 부분파업이 시작됐다. 회사가 유례없는 적자쇼크 속에 초긴축 경영에 나서는 판에 임금 더 내놓으라며 어깃장을 놓는 노조 집행부다. 상품권으로 파업 참가를 독려하겠다는, 믿기 힘든 얘기도 나왔다. 조선 빅3 근로자의 평균 연봉은 7200만∼7500만 원으로 이미 고임금이다. 실적 부진-파업으로 이어지는 양상은 지금 타이어 업계에서, 또 현대자동차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대신 머리띠를 두르고 나오는 강성노조·귀족노조의 ‘자해성(自害性) 파업’에 기업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국회에선 매년 악습이 재연된다. 10일 국정감사를 앞두고 시동을 건 기업인 군기잡기, 혹은 망신주기 호출이다. 산업통상자원위원회만 150명 넘는 기업인의 명단이 오르내린다. 세금을 사용하는 기관의 정책을 따지는 것이 본질이고,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 기업으로부터 조언을 청하는 것이 정상인데, 본말이 뒤집힌 지는 오래다. 지난해 정무위원회 국감에 출석한 기업인 11명 중 10명의 답변시간은 평균 1분 정도였고, 1명은 질문조차 받지 못했다. 글로벌 기업 리더까지 예사로 불려가 모멸감을 견뎌야 하는 나라에서 기업을 할 의욕이 생기겠는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건 결국 기업이다. 삼성전자가 5월 착공한 평택 반도체 공장은 15조 원이 투입돼 15만 명의 고용을 창출하는 초대형 투자다. 그러나 건설장비업체 등이 결성한 단체가 중장비·자재를 모두 현지에서 조달하라며 시위를 벌이면서 공사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한다. 이웃 안성에선 평택공장 전기 공급에 필요한 송전선로 건설을 거부하고 있다. 2012년 삼성이 중국 시안(西安) 반도체 공장을 기공할 때 시안 시내에서 공장까지 20㎞ 거리엔 붉은 환영 플래카드가 끝없이 이어졌다. 투자하는 기업조차 곤혹스럽게 하는 지역이기주의가 버티고 있는 한 ‘메이크 인 코리아’는 난망이다.

최근 삼성·현대차·SK·LG·롯데·GS·한화 등 대기업들이 경쟁하듯 청년고용 플랜을 내놓았다. 박근혜 대통령과 대기업 회장들의 회동 이후의 일이다. 악화일로의 청년실업 해소에 도움은 되겠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약속이란 한계가 있다. 더구나 청년 일자리 확대를 위해선 노동계 양보가 전제돼야 한다. 노사정 협상에서 고용·임금 유연화에 진전이 전혀 없는데, 기업에 먼저 부담을 지우는 것은 정년 60세 법을 덜컥 통과시킨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부는 자신이 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업에 떠넘긴다.

시들어가는 한국경제 성장엔진을 다시 돌리려면 이 땅에서 도전적인 투자를 하려는 기업가들이 박수와 예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노조·지역이기주의·정치권·정부가 사사건건 가로막는 것이 현실이다. 기업가를 절망케 하는 나라엔 희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