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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15년 09월 18일(金)
잘 미루면… 때론 잘 이룰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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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획의 철학 / 카트린 파시히·사샤 로보 지음, 배명자 옮김/와이즈베리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인문학적 깊이가 엄청난 것도 아니고, 읽는 순간 사람 마음을 혹하게 하는 실용 지침이 가득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렇고 그런 책이라는 말인데, 그렇지 않다. 책이 주는 위로가 이 많은 것들을 상쇄한다. 책을 읽으면 이런 생각을 한다. “맞아. 이런 위로, 이런 변명이 좀 필요해.”

책은 습관적으로 일을 미루는 지연 행동, 심한 경우 지연장애의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방식을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 각종 실험과 데이터 등을 총동원해 분석한다. 지연행동의 대상은 특정 업무나 과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상의 모든 일은 물론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일까지 포함한다.

디자인 에이전시 대표로 일하다 ‘당신은 여기에 존재한다’로 독일어권 최고의 문학상인 잉게보르크 바흐만 상을 받은 카트린 파시히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출신의 저술가 사샤 로보는 이를 LOBO(Life style of Bad Organization), 조직화에 형편없는 생활 방식이라고 부른다. 스스로를 LOBO라는 이들은 책 첫 머리에 “습관적으로 일을 미루는 우리가 우리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썼다”고 밝힌다.

이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미루기, 딴짓하기 등을 포함하는 지연행동이 남에게 비난받고, 스스로 자책할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노동 신화와 성과주의를 양축으로 달려가는 자본주의 너머를 생각하게 하고, 때로는 창의적인 결과까지 낳는다는 ‘지연 행동 예찬론’이다.

모든 일을 계획대로 처리하고 일의 경중을 정확히 판단해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많은 일들을 조화롭게 처리하는 사람들이라면 ‘뭐 이런 시답잖은 말이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일반인의 20∼95%가 지연행동을 한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위로에 용기를 얻어 자신의 지연행동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또 LOBO 예찬론자지만 저자들도 ‘미루기=진리’라고 할 만큼 비상식적이진 않다. 책은 지연행동의 개인적, 사회적 메커니즘을 살피고 어떻게 하면 이를 보완할 수 있는지 모색한다. 그렇다고 성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는 조언은 아니다. 별것 아닌 것은 무시하고, 중요한 것은 챙기며 ‘룰루랄라 여유롭게 제때 해내기’. 참으로 매력적인 목표를 말한다.

사람들은 왜 자기 앞의 일을, 그것도 긴급해 보이는 일까지 미룰까. 우선 본성론이다. 사람들은 긴급함이 안락함을 제한하고 압박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안다. 행복해지려면 압박을 가능한 줄여야 하기에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조작적 조건화’로 설명한다. 몇 번 시험 삼아 미뤄보고 별일 없다고 확인하고 나면 습관적으로 미루게 된다. 주어진 과제가 주는 스트레스와 두려움, 과도한 낙천주의, 지나친 완벽주의, 싫증내는 성향, 주의력 결핍 등도 원인이다. 인간의 단기적으로 계획하는 인격과 장기적으로 계획하는 인격이 충돌한 결과라는 설명도 있다.

여기에 너무 많은 자극과 역할이 쏟아지는 현대의 삶, 외부 환경이 작동한다. 디지털 혁명으로 과학 기술 숙달은 생활의 전제조건이 됐다. 독일 베를린 교통국이 발행하는 티켓은 무려 117종. 지하철을 타려면 천재 수학자 라이프니츠조차 헤맬 만큼 복잡한 티켓 자동 발매기와 마주해야 한다. 가전제품이 발달하면서 주부들은 오히려 더 많은 종류의 가사 노동을 하게 됐고 모든 직업군에서 업무와 요구사항은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인터넷과 디지털 등은 주의력 결핍을 일상사로 만들었다.

따라서 무계획, 미룸, 늑장, 모른 척하기는 세상 앞에 무릎 꿇는 좌절이 아니라 세상과의 전투에서 불필요한 일을 걸러내는 필터이자 보호막으로, 복잡하고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순간의 기회를 감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미루기가 오히려 창조적 결과를 낳기도 한다. 조엘 코엔과 에단 코엔 형제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톤 핑크’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밀러스 크로싱’ 시나리오 작업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떤 일은 내버려 두면 저절로 해결되고, 마감 직전에 생기는 집중력과 에너지는 게으름을 상쇄하고 심지어 결과를 더 좋게 만들 때도 많다. 그러니 무차별 폭격처럼 쏟아지는 일들 중에 일부를 하지 않았다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게으르고 싶어서 게으른 것이 아니다. 우리도 부지런해지려고 무척 애를 썼다. 우리 LOBO는 자신의 한계와 우주의 한계를 알고 있는 겸손한 사람들이다. 여러 해 동안 자기 의심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나쁜 사람들이 없다.”

지나친 변명이자 과장같지만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그냥 넘어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충동을 억제할수록 충동조절력은 약해지니 지나치게 억압하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은 과감하게 아웃소싱하라. 최종 데드라인 전에 자기만의 데드라인을 여러 개 만들라 등이다. 무엇보다 책이 가장 중요하게 내거는 것은 ‘내적 동기’이다. 어떤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데엔 좋아하고, 하고 싶은 충동 같은 내적 동기와 보수·외적 압력 같은 외적 동기가 작용한다. 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는 것, 미루지 않고 계속 하게 하는 것은 바로 내적 동기이다. 그러니 내적 동기가 높은 것을 찾아라. 이것이 ‘룰루랄라 여유롭게 제때 해내기’ 위한 왕도이다.

결론이 너무 당연해 좀 시시해 보인다. 하지만 ‘내적 동기의 발견’, 이것이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돌아봐야 할 출발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심각한 LOBO라고 해도 힘을 내서, 저자들의 충고대로라면 여유롭게 룰루랄라하며 이 출발점을 발견하고 가꾸는 것, 이 일만은 미뤄서는 안된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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