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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5년 09월 18일(金)
“위안부, 강제성이 없어?… 세계인권史에 유례없는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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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자 이이화는 지난 8일 경기 파주시 헤이리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국가권력이 개입한 세계사적 범죄행위”라며 “아베 정권이 이를 왜곡하는 것은 일본이 침략주의적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在野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는 올해 세는나이로 여든이다. 호적에는 1937년으로 돼 있으나 1936년 8월생이다. 지난달 가족과 몇몇 지인들이 조촐한 팔순 생일상을 나눴단다.

그에게는 항상 ‘재야 역사학자’란 말이 붙어왔다. 학력이래야 초·중등 졸업장도 없이 고졸(광주고)이 전부다. 대학은 중퇴했다. ‘재야’라는 호칭에는 온전하게 대학 전공과정과 박사까지 한 ‘주류’가 아니라는 의미가 있다. 그는 태생부터 ‘비주류’였다. 대구 빈민촌에서 ‘팔삭둥이’로 태어나 자그마한 약골이었고, ‘서자’였으며, 학교에 다니려고 집을 나와 고아원을 전전했고, 우리 사회의 밑바닥 직업을 고루 맛봤다. 그의 인생사를 듣다 보면, 160㎝도 안 되는 이 작은 체구의 사나이를 끌고 온 힘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스펙’이라 내세울 게 없던 그는 100권을 넘나드는 책을 냈고, 우리 사회에서 유일하게 역사 관련 글만 써서 먹고살아온 ‘전업’ 역사저술가다. 어려운 학술서로 취급되던 역사서를 인물과 스토리로 줄기차게 풀어내 대중화했다. 그 인물들은 대개 ‘아웃사이더’였고, 스토리는 민중의 시각에 맞춰졌다. 혼란기의 힘겨운 삶은 체험적 사료가 돼 그의 책에 녹아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역사책도 많이 펴내 ‘역사 할아버지’로 대접받는다.

이이화의 아버지는 근대 주역(周易) 학자 중 ‘태두’로 대접받는 야산(也山) 이달(李達)이다. 아버지에게 주역을 배우기 전에 가출해 가학(家學)을 전수하지 못했지만, 이이화의 핏줄에는 학자적 맥이 뛰고 있다.

이이화는 10년에 걸쳐 쓴 역작인 ‘이이화 한국사이야기’(전 22권, 한길사)를 최근 11년 만에 개정해 펴냈다. 지난 8일 경기 파주시 헤이리마을로 그를 찾았다. 그는 여전히 정정했다. 집 현관 문패 위에 나무에 새긴 ‘蛟猶明也堂(교유명야당)’이라는 한자 당호(堂號)가 붙어있다. ‘당호’는 집주인의 생각을 집약해 보여주기 마련이다.

―‘당호’가 이채롭습니다.

그는 직접 당호를 한자로 써가며 설명했다.

“허균의 호(號)가 교산(蛟山)인데, 교(蛟)가 ‘이무기 교’자예요. 강릉에 가면 바닷가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용이 승천하다 말고 잠긴 모습 같아. 바로 옆이 허균의 외가예요. 자신은 용이 못 되고 이무기 정도다, 실패한 개혁 사상가잖아. 유(猶)는 다산(茶山·정약용)의 호가 여유당(與猶堂)이잖아. 여유당, 조심조심한다는 뜻이야. 명(明)은 전봉준의 자(字) 명숙(明叔)에서 따오고. 야(也)는 우리 아버지 호가 야산(也山)이야. 그렇게 모아봤는데 기왕에 발음도 괜찮고.”

―역사학자로서, 허균·정약용·전봉준을 높이 치신다는 거군요.

“다 개혁을 꿈꾼 사상가, 개혁가죠. 허균이나 여유당 모두 신분제나 부정부패 타파 등을 주장한 개혁적인 분들이고, 두 분이 못한 행동을 보여준 게 전봉준이죠. 홍경래니 이런 사람들하고 기본적으로 달라요. 반봉건부터 반외세 등 문제도 행동을 통해 접근한 사람이죠.”

―‘야산’을 넣은 것은.

“그분 역시 후천개벽, 새로운 세상을 주장한 개혁사상가였어요. 나와 인연이 있고, 또 나한테 글을 가르쳐준 사람이니까, 허허.”

―이화(離和)란 이름도 부친께서 주역에서 따온 거라 들었습니다.

“이분이 평생 주역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심지어 자식들 이름에도 주역 괘(卦) 하나씩 붙였어요. 남자 형제가 다섯이고 딸이 하나였는데, 주역 8괘를 형제들 순서대로 붙이다 보니 ‘離’자에 걸렸지. 여기서는 ‘떨어질 리’란 의미가 아니고 ‘빛난다’ ‘불’(火), 떨어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통합시키는 거야. ‘화’(和)는 항렬이고.”

―부친에 대한 기억은.

“경상도 땅 김천 출신이시죠. 사람들에게 ‘야산 선생’으로 높임을 받았고, 학문에서는 고집쟁이 ‘선비’였죠. 그렇지만 반상(班常)을 가리지 않았고, 내 것, 네 것이 없는 분이었어요. 기억나는 게 일제 강점기에 봉초담배 ‘희연’이란 게 있는데, 누군가 아버지한테 ‘담배 한 대 주세요’ 하면 봉지 반을 갈라서 줘요. 어느 날엔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손님들이 찾아와 양반자랑을 늘어놓자 ‘당신 할미가 종과 붙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고 소리를 질러 내보냈어요. ‘무소유’였고, 족보도 하지 마라, 묘 없이 화장해라 라고 했지만, 제자와 자식들이 말 안 듣고 나중에 묘도 크게 하고 그랬어.”

―6·25를 예언했다든지, 축지법을 썼다든지, 야산에 대한 ‘전설’들이 있는데.

“6·25 전에 당시 거처하던 대둔산에서 나와 제자들을 데리고 안면도(安眠島)로 간 것이야. 아버지를 따르던 제자 등 300가구 정도가 같이 갔어요. 나중에 6·25가 났어. 대둔산은 쑥대밭이 됐지. 지금도 대둔산에는 당시 상흔이 많아요. 거기 있었으면 온전하기 어려웠지. 안면도는 안전했어. 이걸 두고 6·25 예언설이 나온 거지. 축지법은 이분이 어릴 때부터 산에서 돌아다녔기 때문에 산 타기를 잘했다는 것이지.”

어머니 얘기를 꺼내면 이이화는 눈물부터 훔쳤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잘살았으나 이십 대에 남편과 사별해 홀로 되었다. 마침 주역 공부를 잠시 접고 성주에서 광산을 경영하던 아버지를 만나 재혼했다. 이이화는 “어머니는 늘 첩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똑똑한 아들 하나 낳으려고 재가를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가출하게 된 데는, 남의 집에 가면 “쟤가 머리는 아주 좋은데 서자래” 하는 소리를 알아듣게 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부친께 한문을 배운 것이 나중에 역사학자가 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됐겠죠.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는 학교에 가면 일본놈이 된다고, 해방 뒤에는 양놈이 된다고 학교에 안 보냈어요. 주역까지는 못했지만 사서(四書)를 떼었어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같은 한시를 짓는 법도 배웠고, 당시(唐詩)를 외우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나를 후계자로 만들려 했고, 공부하다 막히면 담뱃대로 이마를 맞아 피가 난 적도 있어요. 이때 배운 한문이 훗날 역사를 공부하는 밑천이 됐어요.”

‘아버지가 주역의 대가이고 그 주변에 공부한 제자들이 많았는데, 혹시 당신의 인생을 ‘주역 괘’로 예측해본 적은 있는가’라고 묻자 그는 간단히 “없다”라고 답했다. 무심한 듯한 그의 대답을 들으며, 이 부분이 신비주의적인 주역을 공부한 아버지 이달과 역사학자 즉 사회과학자로서 이이화의 성향이 갈라지는 지점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주역 공부하시면서 수행도 하셨냐’고 물으니 ‘관’(觀·바라보기)을 했다고 답했으나, 이이화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천생 사회과학적 스타일이고, 아버지의 제자가 될 순 없었던 것은 아닐까.

―가출을 하게 된 건.

“아버지는 호되게 공부를 시키다가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어머니에게 보내줘. 그때 우리 어머니가 이리(현 익산시)에 있었거든. 14세 사춘기에 교복을 입은 내 또래들을 보면서 ‘ABC’ 하는 걸 들으면 신기하고 부러웠어. 당시에 이광수의 ‘사랑’이니 박계주의 ‘순애보’ 등 해방 직후 나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한번은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 처음 책을 샀는데, 유자호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쓴 ‘율곡의 생애와 사상’이란 책이었어. 소설을 읽다 걸리면 호되게 야단 치던 아버지가 그때는 나무라지 않고 그냥 던져줬어요. 뭔가 이 아이는 당신이 생각하는 길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느낀 것 같았어. 열다섯 살, 6·25전쟁이 한창일 무렵인 1951년 겨울이었지. 어머니에게만 은밀하게 집을 나가 학교에 다니겠다고 말했지. 가출하고 나중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어요. 주자의 권학시(勸學詩) 첫 구절인 ‘사내가 뜻을 세워 고향을 나와 배워 이루지 못하면 죽어서도 돌아가지 않으리’를 인용해 가출 동기를 밝혔고, 이를 보고 아버지도 안심했다고 해요.”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학교에 다니려면 고아원에 들어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 고아원에 들어갔는데 부산 영도 천막이야. 기가 막히지. 굴러다니는 수험서를 달달 외워버렸어. 고아원에서는 그때 경복중, 경기중도 들어갈 실력이라고 했지만, 원장이 일류학교를 안 보내. 야간으로 보내서 낮에 일 시켜먹으려고. 그래서 여수로 갔어. 원장이 사무원을 시켰어. 한자 잘 쓰고 하니까. 그런데 거기도 비리투성이야. 그래서 광주로 갔는데, 고아원에 간 게 아니고 길에서 만난 사람 옆 빈집에 들어갔어. 일제 은단을 파는 행상을 하며 돈을 벌었지. 밤에는 행상을 하고, 낮에는 공부하고. 학원에서 만들어준 가짜 졸업장 가지고 정식 고등학교에 입학했지.”

―광주고는 당시 명문이었는데.

“여관에서 ‘여관 보이’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어요. 운동화 살 돈 없으니까 여관에 내버려진 구두를 신고 학교에 가면, 나를 불량학생으로 보고 규율선생님이 맨날 체크하는 거야. 여관에서 시집 보고 베껴서 시도 쓰고 해서 교내 신문에 내면 실리는 거야. 갑자기 유명해졌어. 그래서 내가 불량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지. 그래서 유명해져서 문예반 활동도 하고 했지.”

―서라벌예대에 다니셨는데.

“돈이 없으니까 장학생으로. 어머니가 보낸 돈으로 방 하나 얻어가지고 자취를 했죠. 김주영, 천승세, 홍기삼, 이근배 등 그때 유명한 이들이 많았어. 명동의 은성, 천둥, 그런데 왔다 갔다 했어. 그러다가 뒤에 어머니가 돈을 계속 대줄 수도 없고, 안 하는 게 낫겠다 생각해서 그만뒀지. 문학을 해보고 싶었으나 접은 거지.”

―이후에 여러 직업을 전전하셨다는데.

“별 직업을 다 해봤어. ‘아이스케키’ 장사에 술집 웨이터도 해보고 매혈도 했어. 심지어 빈대약도 뿌렸지. 농약 센 거를 깡통에 구멍 뚫어서 뿌리는데 수입이 많더라고. 그게 위험한 일이니까. 나도 했지. 여름에 문을 닫고 뿌려야 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건으로 입을 막고 했는데, 어느 날 일을 끝내고 나니 어질어질하고 구역질을 해서 얼른 집으로 왔지. 방 안에 누워 있으려니 입에 거품을 물고 난리가 났지. 백차를 불러 위생병원에 가서 깨어난 거야. 늦게 온 어머니가 보시고 기가 막힌 거지.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저놈이 똑똑하다니까 우쭐했는데, 20대 후반에 취직도 못 했어. 5·16 뒤에 주소지가 바뀐 걸 모르고 지내다 나도 모르게 병역기피자가 됐으니까. 그런 데다 이런 일이 나니까 얼마나 서러워.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내가 팔자가 세니 내가 죽어야 너희가 잘될 거다’라고 예언처럼 말씀하셨는데, 우연이겠지만 어머니 돌아가신 다음에 내가 일이 풀리기 시작했어.”

어머니는 1967년 음력 정월에 66세로 한 많은 이승을 떠났다.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었고 그분에 대한 회한은 없어. 그래도 선생님 대접받고 산 분이야. 그런데 어머니는 정말 불쌍한 분이야. 내가 지금도 어머니 좋아하던 음식 보면 정말 안 넘어가. 하나의 멍에이고 내 운명 같은 것이지.”

―역사와의 만남은 어떻게.

“1967년에 병역기피 족쇄가 풀리면서, 친구인 홍기삼이 연줄을 놓아 동아일보 출판부에서 ‘연감’ 교정 보는 일을 촉탁으로 시작했어요. 한문과 문장을 잘 안다고 다른 교정일도 많이 했어요. 그때 김진배(언론인) 씨가 조사부 차장인가 했는데, 나보고 천재라고 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어. 나머지 노는 시간은 아르바이트하고 공부를 했어요. 매일 을지로 입구 국립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역사 공부를 했어요. 1969년에는 동아일보 창간호부터 색인작업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웬만한 대학 학사과정보다 알차게 공부가 됐어요. 이후에 민족문화추진회, 서울대 규장각 등지에서 일했는데, 그게 석사과정이라고 할까, 공부가 많이 됐지. ”

―역사학계에 등단한 건.

“당시 개혁을 부르짖다가 죽은 허균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쓰려고 자료를 모아 공부하고 있었어요. 동화출판공사에 편집부장이던 신경림 시인이 다리를 놓아 ‘창작과 비평’에 ‘허균과 개혁사상’(1973) 논문을 발표했어요. 유신 시절에 저항의 메시지가 담겨있으니 독자들 반응이 아주 좋았지. 허균은 나를 출세시킨 책 ‘허균의 생각’(1980)으로 인연도 있죠. 당시 잡지를 만들던 ‘뿌리깊은나무’에서 냈는데, 지금은 새롭지 않지만, 당시에 ‘∼생각’이란 제목은 신선했어요. 편집자가 또 한문 투의 본문 표현도 우리말로 바꾸자고 했어요. 해놓고 보니 좋았고, 그게 나중에 나오는 책들에도 영향을 줬죠. 역사학계에 본격적으로 데뷔한 건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한국사연구, 1977)란 논문이었어요.”

―직업 없이 역사 글쓰기만 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요.

“1974년 2월에 문인간첩단 사건이 있었어요. 이호철, 김우종, 임헌영 등 5명을 간첩으로 잡아넣은 거지. 유신 반대 운동하던 문인들을 압박한 거지요. 임헌영은 가까운 친구였고. 이 사건을 보면서 나는 무얼 하나 돌아보게 된 거예요. 동참할 건가, 그저 바라만 볼 건가. ‘동아투위’사건도 지켜보았죠. 현실에 맞설 용기가 없었고, 이 시대적 고민을 역사로 풀어보자 결심했어요. 도피적인 ‘자기호도’의 논리였지. 한국사 집필가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두 가지 결심을 했어요. 한국사 관련 글만 쓰겠다는 게 그 하나고, 역사 대중화를 위해 논문만이 아니라 일반인 관련 한국사 교양서를 쓰겠다는 것이었어요. 사실 직업 없이 ‘프리랜서’로 먹고 살려면 대중적인 글을 쓰지 않으면 힘들었고.”

그의 말대로라면 ‘용기가 없고’ ‘먹고살기 위해서’ 역사 글쓰기에 ‘올인’하게 된 셈인데, 이런 성찰적 모습이 이이화를 이끈 힘은 아니었을까.

―동학농민운동 분야는 선생님이 연구로서만 아니고 법제화에도 기여를 했는데.

“나 혼자 한 게 아니고 동료들하고 했지요. 농민전쟁 100주년이 되던 1994년을 5년 앞두고 기념사업을 벌이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만들었어요. 그 위원장을 맡았지. 전국을 돌며 향토사학자나 유족을 만났고 1993년에 마침내 동학농민운동 유족회가 만들어졌죠. 내가 유족들을 만나고 하면서 유족회가 저절로 된 것이지. 110년 만인 2004년 3월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돼 마침내 농민군이 명예를 회복했어요. 보람이 컸죠.”

―‘이이화 한국사이야기’(전 22권, 한길사) 개정판을 내셨는데.

“1994년 시작해 10년 만에 완간한 시리즈예요. 한길사에서 월 250만 원 정도 선인세를 줬어요. 두 아이 대학 다니고 할 때 학비와 생활비로 요긴하게 썼어요. 전북 장수군 연화마을에 들어가 ‘글 감옥살이’하듯이 썼지만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행복하게 집필했어요. 50만 권 정도 판매됐다니 독자들의 사랑을 크게 받았지.”

―‘한국사이야기’로 돈 벌어 헤이리에 집도 지으신 건가요?

“허허허…… 그건 아니고 보탬은 됐겠지. 그동안 책을 많이 냈잖아요. 어린이 역사책이 많이 팔렸어요. 한국사 어린이용 만화 등이 오히려 생활에는 도움이 많이 됐어요.”

―100권 정도 책을 내셨는데, 인세 수입도 상당할 것 같습니다. 역사가로서 글만 써서 살아온 선생님 같은 분을 성공한 ‘전업작가’라 해야 하나요.

“글 쓰는 사람이니 작가라고 해도 괜찮은데, 내 고교친구 박재승(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의 표현에 의하면 ‘역사 글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은 이이화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세계적으로 드물 거야. 하하하. 어쨌든 이제 주변 사람들한테 내가 술을 살 여유는 생겼어.”

―개정판에 달라진 게 있을 텐데.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에서 보수화에 따른 역사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를 추가했어요.”

이 문제가 나오자 이이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베 정권 들어와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강제성이 없었다느니, 공창과 같다는 얘기 등이 나오는데, 독도 문제보다 심각해요. 위안부 문제만큼은 세계 인권사에 이런 경우는 없어요. 한·일시민교류연대에서 내가 대표를 맡으며 일본 여성학자들을 만나보면 모두 일본의 만행을 인정해요. 극우 쪽에서 왜곡하고 있단 말이지. 또 문제는 우리 내부에도 있어요. 일본도 두 세력이 있지만, 우리 안에도 식민지근대화론이니 뉴라이트니 해서 일본식 논리를 가지고 있어요. 일종의 매춘행위로 일본의 강제성이 꼭 개입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어요. 군대에서 위안부를 만들어놓은 것이 왜 강제성이 없어요. 미쓰비시(三菱)라든가 신일본제철이 대신해준 거면 국가개입이 아닌가.”

―지금 큰 이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입니다. 여당의 대표가 직접 ‘우리 역사가 자학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좌파적 입장만 반영돼 있다’며 강행할 모양인데.

“‘자학사관’이란 것이 일본에서 먼저 만든 것이에요.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나온 거지. 일본의 식민 지배와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사관을 자학사관이라 공격한 거야. 왜 우리 멋진 역사를 가지고 자학하느냐, 우리도 여기에 대입한 것이야. 독재정권을 비판하거나 친일 문제를 비판하기만 하면 너무 자학적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는 논리예요. 독재나 친일을 비판하는 학자를 좌파로 모는 거죠. 마르크스주의 계급 논리로 역사를 해석하면 좌파지만, 독재·친일파를 나무라는 것은 민주운동, 민족운동이라 불러야지. 국정화 반대 움직임이 거세잖아요. 우파적 지식인들도 문제를 지적하고 있고.”

―요즘도 글쓰기와 강연을 계속하시는데, 또 나올 책이 있나요.

“청소년용 ‘한국여성사’를 쓰고 있어요. ‘여성사’가 전문 학자들에 의해 나왔지만, 조선시대 부분은 굉장히 미약해요. 기존 여성사의 저자들이 대개 외국 유학 갔다 온 사람들이기 때문일 거예요. 특히 열녀 문제 같은 거, 삼종지도, 칠거지악 등 유교의 아주 나쁜 문화요 관습이지만 아직도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못 해 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요. 여기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들어가고. 그런데 해방 이후 ‘양공주’라고 하는 것, 이것도 제대로 정리된 바가 없거든. 그걸 어떻게 다룰지 마무리하고 있어요.”

인터뷰 = 엄주엽 문화부장 ejyeob@munhwa.com
e-mail 엄주엽 기자 / 문화부 / 부장 엄주엽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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