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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15년 10월 02일(金)
佛法·理氣·씨알·生命… ‘1300년 철학사’를 헤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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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 / 전호근 지음/메멘토

한국에 철학이 있는가? 존재 증명을 요구하는 이 질문 자체가 편견 덩어리다. 철학이라면 서양철학을, 동양철학이라 해도 공자·맹자의 유가 사상이나 노자·장자 정도를 떠올리는 손쉬운 편견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한 전호근 경희대 철학과 교수의 구체적인 설명은 이렇다. “조선 성리학을 전공한 내가 이황과 이이의 글 앞에서 머리를 싸맸던 1980년대 후반,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성리학에 대한 지성계 일반의 평가는 가혹했다. 당대를 풍미한 마르크시즘의 유물사관에 따라 봉건적 관념론으로 폄하됐고 민주화 열기가 가득했던 시대엔 체제 수호를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적대시됐다. 실용을 추구하는 풍토에선 쓸모없는 공리공담의 학문으로 매도되더니, 급기야 조선을 망친 주범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시대에 한국 철학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입 밖에 꺼내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막스 베버 같은 독일 사회학자는 말할 것도 없고, 영미 학자들 대부분이 동아시아의 사유를 사상이나 철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아시아 철학을 철학이 아니라 화석화된 유물로 여겼고, 색다른 견해를 접하면 신기한 물건을 보듯 ‘타자화’했다. 서구가 우월하다는 관점에서 대하다 보니 1960년대에 와서야 사상으로 받아들였고, 철학으로 인정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이를 우리 지성계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공자인 저자가 이제야 ‘한국철학사’를 내놓은 것은 상당히 뒤늦은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890여 페이지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의 책은 연구서나 논문집이 아니라 대중적 교양 단행본으로, 또 여러 저자의 공저가 아니라 한 연구자가 일관된 관점을 갖고 기술했다는 점에서 한국 철학사와 관련한 본격적인 첫 저작이다. 이 또한 뒤늦은 일이다.

책은 신라의 불교 철학자 원효(617∼686)를 시작으로 시민 운동가 장일순(1928∼1994)까지 1300여 년에 걸친 한국 사상가 35명의 핵심 철학을 살핀다. 2012년 공공 도서관에서 진행한 강의를 토대로 저자가 지난 1년간 3분의 2 이상을 빼고 더해 책으로 펴냈다. 호명된 철학자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한국 철학사의 새벽을 연 원효, 선문(禪門)의 원조인 지눌, 한국 철학의 대표 주자인 이황, 이이,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은 물론 주로 고전 문학적 측면에서 다뤄온 이규보, 박지원 등도 철학으로 접근한다. 한국 사상사에서 금기시된 일제강점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신남철, 박치우를 복권했고 종교 사상가 유영모, 함석헌, 시민운동가 장일순도 철학자로 조명했다. 저자는 한국 철학사에서 대표적 사상가를 거칠게 골라도 120여 명은 쉽게 넘지만 우선 이번 작업에서는 35명만 다뤘다고 했다.

이들 중 원효를 그 첫 인물로 등장시킨 것은 원효가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친 첫 한국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원효의 대표적 저술인 ‘대승기신론소’의 10세기 이전 필사본이 중국 둔황(敦煌)에서 발견됐고, 시기적으로 앞선 중국 투르판 필사본도 올해 초 독일에서 발견됐다. 1500년 이후에는 일본에도 원효의 저술이 상당히 많이 소개됐다. 학술 교류가 더 부진했던 시대에 중국과 일본에서 읽혔다니 그의 국제적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원효에 앞선 시기에 한국 철학이 전무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고조선의 철학이나 단군 신화에 철학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거나 철학적 사유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단군 신화는 한민족의 기원을 묻는 철학적 질문, 즉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철학적 물음에 부합한다. 하지만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신의 세계에 가 있기에 ‘철학’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밝힌다.

한편 원효와 의상, 균여와 의천, 정몽주와 정도전, 이황과 이이, 박지원과 정약용 등 우리 철학사의 라이벌들의 사유를 비교해 보는 것도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원효와 의상은 철학적으로 대립각을 세우진 않았지만, 깨달음을 얻는 방식과 불법(佛法)을 전하는 방법에서 파격과 정통으로 나뉜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사후에 평가가 뒤바뀐 인물로 태종대에 와서 정몽주는 역신에서 충신으로, 정도전은 혁명의 주도자에서 반역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다. 조선 주자학의 대표 철학자인 이황과 이이의 경우, 이황은 이(理)를 강화하는 쪽으로 주자학을 전개하면서 중국 주자학의 본류와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인 독창적인 철학자였고, 이이는 주자학의 논리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설명한 조선 주자학의 완성자였다. 이렇게 철학자의 사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국 철학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각종 논쟁들, 돈점 논쟁, 태극 논쟁, 사단 칠정 논쟁, 인심 도심 논쟁 등도 흥미롭게 다룬다.

이렇게 원효부터 현대 사상가까지 올라오면서 책은 1300여 년을 거치면서도 두 가지 관점을 ‘사유의 틀’로 유지한다. 먼저 동아시아 지성사의 맥락에서 한국 철학을 파악한 것이다. 한국 철학자의 사상이 당대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어떤 위치였는지에 대한 좌표 매김이다. 한국 철학의 고유성은 “보편적 맥락에서 당대 지성사를 충실하게 반영하면서 한국적 현실을 고민할 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신라부터 1300여년을 관통하는 한국 철학의 특징이다. 저자는 이를 ‘통합과 포용’이라고 결론 내린다. “한국적 사유는 양극단을 통합하고 상대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전개돼왔다. 원효, 의상, 의천, 지눌은 물론 동학의 최제우, 적대 세력을 포용한 시민운동가 장일순까지 극단의 통합과 포용이라는 일정한 흐름을 만들어왔다.” 저자는 한국철학적 전통이 지금 우리 사회에 갖는 의미도 여기서 찾았다.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의 처지를 아우르는 것, 우리가 결국 같은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철학에서 배워야 한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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