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한기호 “한달 500장 쓰고 강연 20회… 통장은 마이너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책에서 모든 것을 배웠고, 또 배우고 있다는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이 연구소의 서가 가운데 서서 환하게 웃고 있다. 기획회의는 400호를 넘어 401호가 나왔다. 김선규 기자 ufokim@

출판계 나침반 ‘기획회의’ 400호 돌파…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

출판 평론가 한기호(57)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매일 새벽 2, 3시에 일어난다. 지난 1980년 공주사범대 재학시절 ‘사대신문’ 편집장이었던 그는 엄혹한 시대, 매일 밤 폭음으로 쓰러졌고 새벽 2, 3시에 일어나 원고를 휘갈겼다. 가난한 집안 6남매의 장남으로 제정신으론 날선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1980년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돼 4학년 때 제적됐다.) 남다른 청춘의 습관은 이 중년 열혈 평론가의 일상이 됐다.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찾는 전화도 오지 않는 새벽에 그는 책상에 앉는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새벽에 이미 남들 하루치 일을 해 버리니 그의 하루는 남들보다 2배나 긴 셈이다.

그는 매일 의무적으로 책 한 권을 읽고, 한 달 평균(200자 원고지) 500장을 쓰며 20여 회 강연을 한다. 단독 저서는 20권, 공저까지 합하면 100권이 넘는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북바이북, 어른의 시간 등 출판사 브랜드 다섯 개를 운영하고 두 개의 잡지, 출판전문 격주간지 ‘기획회의’와 월간 ‘학교 도서관 저널’을 낸다. 여기에 그가 출판계에 던지는 화두와 논쟁까지 더하면 엄청난 생산량이다. 이렇게 바쁘게 몸을 움직이지만 돌봐야 하는 ‘식구들’이 많은 탓에, 딸 둘에 여든 셋의 노모를 모시고 사는 ‘돌싱 대디’인 그의 통장 잔액은 현재 마이너스이다. 넘치는 생산량과 부족한 통장 잔액. 이 불편한 불균형을 안고 사는 그를 지난 2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가 15년간 일했던 창비 영업 책임자 생활을 접고, 1999년 창간한 ‘기획회의’가 최근 400호를 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겐 낯설지만 ‘기획회의’는 출판계 내에서는, 출판 관계자들이 가장 많이 참고하는 ‘핫한’ 출판·서평지이다. 심하게 과장하자면 출판계의 뉴욕타임스라고나 할까.

“1999년 2월 첫 호를 낼 때부터 지금까지 현장의 목소리, 필드의 목소리를 전하려 했다. 관련 팩트, 주요 현안, 편집자 이야기, 서평까지. 출판과 관련해 다루지 않는 것이 없다. ‘기획회의’엔 주로 출판 종사자들이 글을 써왔는데 개인적으로 그들의 글을 읽는 것이 행복했다. 그들 또한 남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의 ‘편집자란 누구인갗, 정은숙 마음 산책 대표의 ‘편집자 분투기’ 같은 연재물이 떠오른다. 돌아보니 ‘기획회의’는 멍석을 까는 일을 한 것 같다. 펼쳐놓은 멍석에 많은 사람들이 놀았다.”

지방 신생 출판사에서 일하다 창비에 영업 담당자로 스카우트돼 소설 ‘동의보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 베스트셀러를 만든 그가 1998년 임원(이사대우·영업기획실장)으로 뒷선으로 물러앉는 대신 독립해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열었을 땐 잡지 발간은 생각지도 않았다.

“재활용품점에서 책상과 책장을 사다가 대강 칸막이만 쳐서 사무실을 열었다. 그때 생각지도 않게 광주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결정돼 4500만 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그 돈이 밑천이 됐다. 처음엔 출판사들을 상대로 마케팅 컨설팅을 하려 했다. 영화 ‘쉬리’ 개봉을 앞두고 소설 ‘쉬리’를 내겠다는 후배 출판사 컨설팅을 했다. 내 덕분만은 아니지만, 그 소설은 10만 부가량 팔렸다. 하지만 그 뒤 찾아오는 출판사들이 하나같이 이번 책을 성공하지 못하면 끝장이라는 절박한 곳들밖에 없었다. 이렇게는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해 컨설팅은 깨끗이 접었다. 대신 출판 도매상 송인서적에 무가지 출판잡지를 제안했다.” 출판전문지를 내면 송인서적은 이미지를 높일 수 있고, 잡지는 잡지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999년 2월 무가지 ‘송인소식’ 첫 호가 나왔다. 하지만 송인소식이 점점 자리 잡으면서 출판계의 기대가 높아졌고 요구 사항도 많아졌다. 또 무가지의 한계도 있어 2004년 7월 유가지로 전환하며 제호를 ‘기획회의’로 바꿨다. ‘기획회의’는 창간호부터 반응이 좋았다. 그 뒤 기획회의는 출판계 소식, 트렌드, 이슈를 전했다. 일군의 출판평론가를 키워내는 역할도 했다. 최성일, 이권우, 표정훈, 한미화, 김성신 등 출판평론가라는 이름을 달고 본격적으로 활동한 1세대 평론가들을 길러낸 곳이 기획회의다. 이 부분에서 한 소장은 다시 ‘멍석론’을 들고 나왔다. “멍석을 깔았을 뿐이다. 지면을 제공했고, 그 사람들이 와서 글을 쓰면서 마음껏 놀았다”는 것이다.

‘기획회의’에서 출발한 그의 멍석은 그 뒤 점점 넓어졌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외에 2003년 기획출판사 북 페뎀을 열었고 책 읽기·책 쓰기·독서운동과 관련된 책을 주로 내는 북바이북, (그에 따르면 분단문제 다음으로 심각한 고령화 문제를 다루기 위한) ‘어른의 시간’, 대안 연구공동체와 함께 출간하는 ‘길 밖의 길’ 등 출판 브랜드 4개를 더 만들었다. 어린이·청소년의 책 읽기, 학교 도서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는 학교도서관 저널 대표도 맡고 있다.

이 많은 일들을 어떻게 다 하느냐고 묻자 그는 가능한 이유를 두 가지로 들었다. 먼저 책이다. “많은 결정을 하려면 판단력과 순발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답은 책에 있다. 책엔 모든 것이 있다. 열심히 읽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 놓기도 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인 미디어일 수 있다.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나에게 책은 모든 것을 가르쳐줬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쓰면, 데이터베이스가 되고 그것이 다시 책으로 나온다.”

책과 함께 현재의 그를 가능케 한 것은 창비 시절 백낙청 선생에게서 받은 훈련이었다. “창비 다니는 동안 백 선생에게 직접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 백 선생은 서울대 교수로 1주일에 한 번 출판사로 왔는데, 백 선생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5분에서 10분 정도밖에 없었다. 백 선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는 것을 싫어했다. 상황을 정확히 요약해 내 의견까지 더해 설명해야 했다. 할리우드 영화감독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동안 돈 많은 제작자를 설득해야 하는 ‘엘리베이터 스피캄였다. 10년 정도 그렇게 하다 보니 핵심을 파악하고,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능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사실 그에게 백낙청 창비 편집인은 아버지이자 경쟁자였다고 했다. “이겨야 하는 그런 경쟁자가 아니다. 넘어야 할 인생의 목표랄까. 창비를 나올 때 언젠가 백 선생님에게서 ‘너 참 열심히 살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갈림길에 섰을 때 언제나 돈이 되는 길보다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길을 가려 했다. 2011년 한 행사장에서 만난 백 선생이 ‘너는 출판사 안도 밖도 아닌 중간 지점에서 일할 때 가치 있는 일을 한다. 우리 사회의 점이 돼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경쟁자를 이겼고 목표를 이뤘다”고 그는 돌아봤다. 이어 그는 “사랑은 내리사랑이듯 이젠 내가 후배들에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배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출판마케팅연구소나 기획회의 등도 자력으로 꾸려나갈 수 있는 정도가 되면 후배들에게 넘기고 손을 뗄 계획이다.

물론 출판을 잘 아는 출판평론가라고 해서 베스트셀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렇게 일을 벌이지 않고 여유있는 출판사에서 기획만 했다면 오히려 돈을 더 많이 벌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 절친한 기자는 그에게 ‘일부러 돈 안 되는 책만 골라서 낸다’고 했고, 오랜 동료인 출판평론가 한미화는 “이제 스쿨 그만하고 돈 벌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실제로 출판마케팅연구소는 필요하지만 돈은 되지 않는 출판 매뉴얼 책을 주로 출간해왔다.

“판을 벌여놨으니 수습해야 한다. 애초에 돈 버는 데엔 관심도 없다”는 그는 2000년대 중반 딱 한 번 모든 것을 접고 상업 출판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던 적이 있었다. 2005년 그는 기획회의 초기 멤버들과 함께 일본으로 여행간 자리에서 일명 ‘도쿄(東京) 선언’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일본의 북 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杉浦康平)를 비롯한 일본 출판 편집자들이 그 자신을 일본 출판 평론계 대부인 고바야시 가쓰히로(小林克弘)에 비교하는 분에 넘치는 평가를 하자, 그만 도쿄 선언을 삼켜버렸다. 그는 그때 업구즉통(業久즉通), 즉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라는 자신의 평소 믿음대로 살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업구즉통의 기쁨은 무엇일까.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미약하게나마 그것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권 시절, 일제고사 부활 움직임 속에 학교 도서관 운동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자유학기제도 도입되고 도서관의 역할도 커졌다. 사회적인 독서 운동, 읽기 운동, 쓰기 운동, 토론 운동도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런 변화를 보는 즐거움이 크다.”

그는 요즘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서평 플랫폼이다. “책을 매개로 한 플랫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을 만들겠다. 개인의 플랫폼이 아니라 나눔과 공유를 실천하는 조합 형태의 공동 노동 구조를 만들려 한다. 목표는 출판평론가, 필자, 전문가 등 100명 정도를 모으는 것인데 현재 50명 정도 모였다. 이 플랫폼 안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포함해 책과 관련된 여러 단체들이 모일 수 있을 것이다. 생활 속에서 책 이야기로 연결되는 책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여전히 책의 미래를 믿는 그는 정보 폭발 시대에 멍석 정도가 아니라 큰 둑을 만들고 있다.

인터뷰 = 최현미 차장 (문화부)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