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노동개혁 비웃는 造船노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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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평 / 논설위원

9·15 노사정 합의문을 두고 기대에 못 미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그중엔 의미를 부여할 만한 내용도 있다. 예컨대 ‘근로소득 상위 10% 이상의 임직원은 자율적으로 임금 인상을 자제한다’는 조항은 그 재원으로 청년 고용과 비정규직·협력업체 근로자 처우 개선에 쓰겠다는 것으로, 노동계의 보기 드문 양보다. 하지만 합의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아니 애초부터 합의 자체를 무시한 채 역주행하는 노조들이 있다. ‘귀족노조’ ‘강성노조’로 통칭되는 일부 대기업 노조다. 이미 다른 근로자의 부러움을 살 정도의 고임금인데도 월급봉투를 더 늘리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조선(造船)업계 실적은 사상 최악이다. 현대중공업이 지난해 3조2000억 원대 손실을 내면서 7분기 연속 적자를 이어가는 중이고,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은 올 2분기에만 각각 3조 원대, 1조5000억 원대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3분기엔 선박 수주량에서 9년 만에 중국·일본에 밀려 3위로 처졌다. 각사가 세운 올해 목표 수주량을 채우려면 까마득하다. 벼랑 끝에 서 있다는 표현이 실감 나는 상황이다. 이런 위기에서는 노사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조선업계 노조는 파업을 앞세워 임금 인상 투쟁에 나섰다. 회사 사정은 알 바 아니라는 투다.

더 기이한 것은 이런 비상식적 요구가 먹히는 현실이다. 삼성중공업은 지난달 10일 조선 빅3 가운데 처음으로 임금협상을 끝냈다. 기본급은 0.5% 올렸지만 공정단축 격려금, 임금타결 격려금, 위기극복 격려금 등 이름도 다양한 지출까지 합치면 노조원은 1인당 500만 원 이상을 더 얻어냈다. 조 단위 적자를 낸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24일 임금협상을 타결한 대우조선은 한술 더 뜬다. 기본급만 동결하는 형식을 빌렸을 뿐 역시 각종 명목의 격려금과 회사 주식 150주를 합쳐 1인당 900만 원가량을 안겼다. 누가 많이 챙기느냐 경쟁하는 양상이다.

대우조선은 ‘국민기업’이다. 2001년 2조9000억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소유가 됐다. 공적자금의 최종 부담자는 국민이라는 점에서 혈세로 회생한 기업이다. 그러나 대우조선은 지난 10여 년 동안 고문·자문·상담역 명목으로 위촉한 비상근 임원들에게 억대 연봉을 주는 등 100억 원 이상을 펑펑 써온 사실이 드러났다. 대규모 적자와 방만 경영으로 경영진이 국정감사에 불려가 질책 받자 대우조선 노조는 ‘정치적으로 악용 말라’는 비판 성명을 냈다. 대우조선 정상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주인 없는 회사’의 노사가 ‘900만 원’ 임금합의안을 내놓은 것이 그로부터 1주일쯤 뒤다.

빅3 중 유일하게 쟁의 중인 현대중공업 노조는 수차례 파업을 벌이는 동안 전례 없는 방식까지 동원했다. 초기에는 파업 참가자에게 상품권을 주겠다는 계획을 내놓더니, 정몽준 고문을 압박한다며 국제축구연맹(FIFA) 본부가 있는 스위스 취리히에 투쟁단을 보내겠다는 노조다. 급기야 회사가 가진 주식과 부동산을 팔면 임금을 올릴 수 있다는 주장까지 들고 나왔다. 일련의 기막힌 행동에 수긍할 국민이 과연 있겠는가.

위기 탈출을 위해 조선 3사는 일제히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불요불급한 조직을 줄이고, 자산 매각에 나서고, 임원을 20∼30% 감축하고, 희망퇴직이나 권고사직 형식으로 수백 명씩 간부들을 솎아내고 있다. 그러나 생산직이 대부분인 노조원들은 구조조정 태풍에서 벗어나 있다. 한편에선 동료들이 떠밀려 직장을 떠나는데 자기 몫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행태는 비정하다. 미국에서는 불황기에 대규모 인력을 내보냈다가 회복되면 다시 불러들이는 식으로 위기를 넘긴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국내 조선업계는 보유 인력을 놀릴 수 없어 축적된 노하우가 부족한 해양플랜트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부실을 자초했다는 분석도 있다.

세르지오 호샤 한국GM 사장은 지난달 한 좌담회에서 “한국에선 최고경영자가 1년에 2∼3개월은 임금협상에만 매달려 있어야 한다”며 “그럼 대체 일은 누가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강성노조, 귀족노조가 제 몫 챙기기에 몰두하는 동안 회사는 정상적인 경영이 어렵고, 노동시장 내 양극화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노조들을 무풍지대에 둔 채 진행하는 노동개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