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밖 그곳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전설의 땅들.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 ‘걸리버 여행기’(1910) 속 라퓨타를 발견한 걸리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 초판 권두 삽화(왼쪽에서부터). 열린책들 제공

전설의 땅 이야기 / 움베르토 에코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표시한 지도. 누군가 그 지도를 갖고 여행을 다녀왔다면 그는 행운의 탐험가이거나 능란한 이야기꾼일 것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 정도를 제외하면 이 같은 일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은 픽션의 세계이다. 픽션의 세계에선 주인공이 그런 지도를 손에 쥐는 순간, 모험이 시작된다. 해리 포터가 런던 킹스크로스 역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호그와트행 기차를 타듯이 말이다.

우리 시대 지식인 움베르토 에코의 ‘전설의 땅 이야기’는 독자들을 바로 이 같은 환상의 여행에 데려간다. 책은 “전설의 땅과 장소를 다루고 있다”는 첫 문장대로 실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신화와 전설 속 장소, 환상과 상상의 땅을 둘러본다. 에코가 다루는 전설의 장소는 성서 속의 땅, 호메로스와 7대 불가사의의 땅, 지상 낙원 축복받은 자들의 섬 엘도라도, 사라진 땅 아틀란티스, 성배의 이동, 유토피아, 지구 내부를 거쳐 소설을 통해 탄생한 허구적 장소까지 15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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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식한 지식인답게 에코는 그리스 로마 신화, 성경 이야기, 장소에 얽힌 전설과 역사, 플라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철학 그리고 보르헤스와 홈스 등 문학 텍스트까지 가로지르며 풍부한 인문학적 설명으로 각각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넓은 인문학적 맥락 안에서 이들 장소와 관련된 지식의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게 된다. 에코의 전방위적인 현란한 설명도 설명이려니와 책을 펼친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소장하고 싶게 하는 욕구, 책꽂이에 꽂아두고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펼쳐보고 싶은 열망을 일으키는 것은 300여 개의 아름다운 삽화이다. 수 세기 전의 지도, 각종 성화와 명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8) 초판 삽화, 쥘 베른의 ‘해저 2만리’(1870) 삽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910) 삽화,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적인 그림까지 눈길을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다.

이렇게 박식한 설명과 아름다운 그림을 통해 전설의 땅 이곳 저곳으로 독자를 끌고 다니는 에코가 결국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들 전설의 땅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엔 실제 존재하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곳. 실재하지 않지만 믿음 체계 속에 굳게 자리한 곳.

예를 들어 많은 관광객들이 배를 타고 그리스를 향해 가면서 멀리서 이타카 섬이 보이면 오디세우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호메로스가 묘사한 내용이 오늘의 이타카와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호메로스는 그 섬이 평평하다고 묘사했지만 지금의 이타카에는 산이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디세우스의 섬은 아마도 레프카스(고대의 레우카디아)일 것이라는 의견이 상당하다. 우리가 오디세우스의 고향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호메로스가 언급한 나머지 땅들을 확인할 수 있는가?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따라가는 지도를 그릴 수 있는가?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모험을 벌인 신화 속 장소, 전설의 땅이 실재하지 않는다 해도 이야기로 전해지고, 다양한 텍스트로 반복되면서 그 전설의 장소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어떤 실제의 땅보다 생생하게 존재한다고 에코는 설명한다. 아틀란티스, 유토피아, 성배가 묻힌 곳, 엘도라도 섬 모두 그렇다.

‘평평한 지구’ 역시 그런 전설의 땅이다. 사람들은 흔히 중세인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다고 믿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고 한다. 우리들의 믿음과 달리 고대 후기에 이르러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지구가 구의 형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왜, 또 어떻게 ‘지식의 진보’라는 흐름에 역행해 중세인들에게 이런 인식이 덧씌워졌을까. 에코는 사상가들과 그리스도교의 학문적 논쟁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19세기 세속적 사상가들은 다양한 교파가 진화론에 반대하는 사실에 짜증이 나자 ‘평평한 지구’라는 개념을 그리스도적 사상 전체(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 탓으로 돌렸다. 그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에 대해 교회의 견해가 틀렸으니 종의 기원에 관한 교회의 견해 또한 틀릴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평면적인 지도 기법에 따른 오해까지 더해지면서 중세인의 세계관이 평면적이었다는 믿음이 현재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에코의 설명에 따르면 ‘평평한 지구’ 그리고 ‘15세기의 평평한 지구’ 역시 실존하지 않는 전설의 땅이다.

실제 존재하지 않아도 모두가 실재한다고 믿는 곳. 그렇기에 전설의 땅은 그저 환상과 상상의 장소, 실체 없는 땅이 아니라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실재한다고 믿기에 실제로 확인할 수 없는 한계는 가질 수 없기에 더욱 가지고 싶은 욕망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곳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 순간, 전설의 땅은 현실보다 더 현실같이 다가온다. 환상은 현실을 만들고, 현실은 환상을 더 강화한다. 전설의 땅은 이렇게 환상과 현실, 한계와 그 한계를 넘으려는 상상이 첩첩이 쌓인 매혹의 땅이다. ‘미의 역사’ ‘추의 역사’ ‘궁극의리스트’를 잇는 에코의 4번째 앤솔러지로 2013년 이탈리아에서 나왔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