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금리’ 무기로… 美금융위기를 탈출시켰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자서전 ‘행동하는 용기’에서 “우리 시대를 가장 강력하게 위협했던 경제위기를 막아내기 위한 세계적인 노력에 참여할 수 있었던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뉴시스

행동하는 용기 / 벤 S. 버냉키 / 까치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소?”

2008년 9월 16일 오후 4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앞 테이블에는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재무장관 행크 폴슨을 비롯해 백악관 고위 참모와 다른 금융규제기관 대표 등 10여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버냉키 Fed 의장이 위기에 빠진 아메리칸 인터내셔널그룹(AIG)을 살리기 위해 공적자금 850억 달러를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직후였다. 세계 최대 보험회사인 AIG는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을 이용한 금융상품으로 무모한 도박을 벌였고, 파산 직전까지 와 있었다.

1년여 전, 위기의 서곡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2007년 8월 9일 프랑스의 대형 은행 BNP 파리바가 미 서브프라임 주택 담보부 증권을 보유한 3개의 투자 편드에 대해 투자자들의 현금 인출을 금지했다. 이 “복잡하고도 불투명하게 설계된” 증권의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몇 달째 미 주택시장은 침체되고, 서브프라임 관련 증권이 시장에 급매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미 대형 모기지 회사인 컨트라와이드 파이낸셜이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문까지 나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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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d 의장에 취임한 지 2년째가 된 버냉키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인지했다. 하지만 그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미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2007년 2∼3분기 미 경제 성장률은 기대치를 웃돌아 4%에 가까웠고, 실업률도 낮은 상태를 유지했다. 버냉키는 Fed 위원들에게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문제가 더 넓은 경제와 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은 억제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스스로도 “지난날(1930년대 대공황)의 금융 패닉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해 여름 월스트리트에서 다섯 번째로 큰 대형 투자은행 베어스턴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펀드로 엄청난 손실을 입으며 이듬해 파산에 직면했다. 이어 미국 모기지 시장에서 약 5조3000억 달러의 증권을 소유하거나 보장하고 있는 모기지 업체 프레디 맥과 패니 메이가 흔들렸다.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에 이르러 금융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다른 대형 투자은행들이 잇달아 붕괴 위험에 처하고 주가가 폭락했다. AIG마저 대출 없이는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버냉키는 금융시장의 위기를 사전에 막지 못했지만, 즉각 처방에 나섰다. 사실 투자은행은 증권거래위원회의 감독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들의 내부 자료를 입수할 권한도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대통령과 의회를 설득하면서 때로는 권한 이상의 판단을 내려야 했다. 제로금리, 양적 완화와 함께 그의 주 무기는 구제금융을 통해 적극적으로 기업들을 살리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Fed는 은행과 저축기관에만 대출할 권한이 있음에도 “이례적이고 긴급한 상황”을 적시한 연방준비제도법 제13조 3항을 들어 보험회사에까지 대출을 제공했다. 베어스턴스, 프레디 맥, 패니 메이, AIG 등이 이 조건부 대출을 딛고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다.

물론 버냉키에게 이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금융회사들을 살리기 위해 세금을 투입하는 일에 시민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그도 “AIG 간부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일해 왔는지를 완전히 알게 됐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과 세계 경제에, 분명한 재앙적인 결과들을 초래할 수 없기” 때문에 결단해야 했다.

그는 1930년대 Fed와 세계 다른 중앙은행 지도자들이 파괴적인 디플레이션과 금융산업의 붕괴 앞에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면서 극심한 세계 대공황에 빠졌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힘줘 말한다. “Fed는 2007∼2009년 위기와 후유증을 앓았고 대공황 때와 비슷한 도전에 직면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행동했다.”

책은 2006∼2014년 8년간 ‘세계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Fed 의장을 지냈던 버냉키(현 브루킹스연구소 상임 특별연구위원)의 자서전이다. 700쪽 분량 대부분을 할애해 2008년 전후 최악의 금융위기로 치닫던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생하게 담았다.

위기의 조짐, Fed와 미 재무부의 대응, 이후의 결과 등을 상세히 풀어내 미국 경제 시스템 전반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한편, 버냉키는 지난 4일 책 출간을 기념한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더 많은 금융기업 경영자 개개인에게 책임을 물어 감방에 보냈어야 했다”는 말을 남겼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