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lobal Focus >사우디의 ‘低유가 도박’… 藥일까? 毒일까?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정유공장 전경.

산유국들 ‘석유생산 치킨게임’

“다른 석유시장 참가자들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긴긴 싸움을 계속 이끌어 갈 겁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점은 사우디가 고통을 겪는다면, 다른 시장참가자들은 더 큰 수렁에 빠질 거라는 거죠.”

‘중동의 맹주’ 사우디가 유가(油價) 게임을 거듭하며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지난 11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우디아라비아 원유-고통 없인 얻을 수 있는 게 없다(No gain without pain)’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산유국들의 고민을 이같이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16개월째 하락 국면을 이어가고 있는 국제유가는 올해 하반기 들어 배럴당 50달러(약 5만6570원) 아래로까지 떨어진 상태다.

사우디 주도의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그러나 전통적 전략인 ‘감산에 의한 유가 안정화’ 방식을 포기하고, 지난 2014년 11월 이후 꾸준히 ‘증산 또는 동결’ 방침을 유지해오고 있다. 원유 수요가 침체된 상황에서 미국 셰일가스 업계를 필두로 한 OPEC 역외 국가들과의 시장 점유율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5일 사우디 국영원유기업인 아라비안아메리칸석유(아람코)는 아시아시장에 공급하는 11월 인도분 중질유를, 지역 표준가격보다 배럴당 3.20달러 인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2012년 2월의 2달러 이후 최대 할인폭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원유시장 내 산유국 간 치킨게임의 서막이 올랐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런 가운데 12일 발표된 OPEC 월간 석유 동향 보고서 등은 ‘사우디를 위시한 OPEC의 승리’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다.

◇‘유가 회복’, ‘미국 셰일가스 감산’ 등 잇따른 장밋빛 전망 =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사우디의 점유율 우위 전략이 목표했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분석해왔다. IEA에 따르면 오는 2016년 OPEC 역외 산유량 감소 규모는 소련 붕괴 이후 최대치인 일일 50만 배럴로, 감소량 가운데 80%를 미 셰일가스가 차지하고 그 뒤를 영국, 러시아 등이 따를 것으로 내다봤다. 그 대신 OPEC에 대한 원유 수요량은 내년 2분기 무렵 7년 만에 최고치인, 일일 3200만 배럴로 뛸 것으로 전망했다.

이런 자신감을 반영하듯 압달라 엘 바드리 OPEC 사무총장은 11일 쿠웨이트시티에서 열린 ‘제2회 쿠웨이트 석유 및 가스 쇼(KGOS 2015)’에서 “최근 비OPEC 회원국산 원유 생산량이 감소하고, 수요 증가율은 상승하고 있다”며 “2016년에는 석유시장이 수급 균형상태를 회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알리 알오마이르 쿠웨이트 석유장관 역시 12일 “현재로서는 OPEC (산유량 동결) 결정에 큰 변화를 요구하는 (내부) 요청이나 구상이 제기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 왕실 권위 흔들, 재정적자 급등 등 국내·지역 부작용 = 사우디의 버티기 전략은 먹혀들고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한 국제전문가는 올해 중동의 핵심 이슈를 △이슬람국가(IS)의 공세 △유가 하락 △이란 핵 협상 타결 △러시아의 시리아 내전 개입 등으로 꼽은 뒤 “이 네 가지를 관통하는 의미는 ‘사우디가 가장 잃을 게 많은 나라’라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가장 먼저 원유 판매 수입 감소로 인한 사우디의 재정적자가 심각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사우디의 올해 재정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21.6%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원유 판매 수입이 전체 정부 수입의 80%, GDP의 45%를 차지하는 사우디에서 유가 하락은 엄청난 타격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특히 그동안 막대한 산유량 덕분에 국민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는 대신 역으로 보조금 등을 지급해온 사우디 왕실로서는 엄청난 압박이 될 전망이다. 지난 8월 FT는 “사우디 정부가 균형재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05달러를 넘어야 하는데 50달러를 밑돌게 되자 올해 안으로 270억 달러(약 31조4874억 원) 규모의 채권을 발행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니얼 퍼거슨 미 하버드대 경제사학과 교수는 최근 블룸버그에 “사우디 재정은 완전 엉망”이라면서 “사우디의 저유가 도박이 엄청난 역효과를 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미국과 역사적인 핵협상을 타결한 ‘시아파 이란’과 중동의 맹주 자리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공방전 역시 ‘수니파 사우디’ 재정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지난 3월부터 승산이 뚜렷하지 않은 예멘 내전에 시아파인 후티 반군을 견제하기 위해 적극 개입하면서 사우디의 오일머니는 더욱 바닥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지난 9월 24일 메카 압사사고로 1500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한 점 등으로 중동 지역 내 사우디의 위상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보수적인 사우디에서는 그동안 원유에 대해서만큼은 친(親)시장 정책을 유지해왔는데, 최근 새롭게 부임한 알리 알나이미 사우디 석유장관에 대해서는 친정부적 인사라는 평가가 내부적으로 나오고 있다”면서 “친정부 성향이 강한 사우디 석유장관이 주도한 OPEC 월간 보고서의 장밋빛 전망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만하다”고 말했다.

김리안 기자 knr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