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민중史觀’ 뿌리가 깊어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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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직 / 편집국 부국장

원로 역사학자인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1978년 펴냈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창작과 비평사)은 당시 사학계는 물론 지식인 사회 전반에 큰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분단 극복을 화두로 한 근현대사 연구와 교육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했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한국 근·현대사의 제1, 2기를 식민지로 전락해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되지 못하고 통일 민족국가의 기반조차 만들지 못했던 시기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제3기는 민족분열과 동족상잔을 겪고 분단체제가 굳어져 가는 시기라고 규정했다. “19세기 후반기에 시작된 실패의 역사가 1세기를 넘어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그의 분단사론은 단숨에 역사학계의 한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역사 발전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대전제 아래 민족적·사회경제적 모순 구조를 분석하고 민중의 활동을 역사 서술의 중심에 두는 ‘민중사관’이 등장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에 맞선 민주화 운동, 반미(反美) 및 마르크스주의 확산과 맞물려 민중사관은 기존의 사학적 관점을 뒤엎고 역사학의 주류로 급부상했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했던 1983년, 선배들이 건네준 책들을 밤새워 읽으면서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던 것은 거짓말이었구나” 하는 생각과 충격에 휩싸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반(反)외세·반자본·민중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분단사론·민중사관은 1991년 소련의 붕괴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성 흐름 속에 이론적 실효성이 다한 듯 보였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최근 역사교과서 논란을 계기로 들춰본 고교 한국사교과서 곳곳에서 그런 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회원 700여 명의 국내 최대 역사학회로, 국정화 반대 투쟁을 선도하고 있는 한국역사연구회는 ‘민중이 주체가 된 역사학’을 거리낌 없이 천명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의 변혁과 진보를 실현시켜 나가는 주체가 민중임을 자각하고 민중의 의지와 세계관에 들어맞는 역사학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 변혁주체임을 확신하고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한국역사연구회 인터넷 홈페이지(www.koreanhistory.org) 상단에 게시되어 있는 창립 취지문의 일부다. 말이 ‘학회’지 실상은 ‘민중운동 단체’를 연상케 한다.

한국사교과서에 노동운동가는 있지만 기업인은 실종된 이유, 청계피복노조 전태일을 기술한 분량이 정주영·이병철·구인회 등 세계적 기업인을 합한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민중사관에선 건국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를 친일·친미·독재세력과 민족·민중·민주세력 간 투쟁과정으로 바라본다. 지난 세대의 위대한 사회경제적 성취 역시 민중사관 입장에서 보면 정경유착을 통한 반민중·재벌 세력의 잔치였고, 착취의 결과였을 뿐이다. 필자 스스로도 대학 시절 민중사관을 사회변혁의 핵심이라고 신봉했었다. 그러나 역사는 훨씬 다양한 세력이 다양하게 작용하면서 만들어온 종합적 결과다. ‘민중’만을 중심으로 보면 결국 계급투쟁, 인민민주주의 추구로 귀결된다. 그런 역사 해석이 틀렸고, 그런 혁명은 모두 실패했음은 20세기 역사가 생생하게 가르쳐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증언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교과서 문제에 관한 한 사실상 전권을 가진 정부가 검정 시스템 강화를 통해 해결하는 방식을 포기한 것을 찬성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학계와 교단의 분위기를 볼 때 ‘긴급 피난이자 차악의 선택’으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누가 옳은지 이 또한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쟁의 폐허 위에 대한민국이 땀 흘려 일군 성취를 우리 스스로 폄훼하는 역사인식을 심어줘선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의 역사교과서는 독재 권력과 기득권 세력을 통째로 비판하는 데 치중한 영화 ‘변호인’만 보기를 강요하는 것과 같다. 영화 ‘국제시장’처럼 오늘의 번영을 일군 아버지·어머니 세대의 헌신, ‘연평해전’이나 ‘명량’처럼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온 이야기 등도 제대로 담아야 한다. 앞으로 국정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소모적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역사서술 과정의 한중심에 놓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