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정선희 “번역가는 무슨… 행복하게 살 힘 얻었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방송인이자 번역가로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선희가 특유의 웃음을 만면에 지으며 힘찬 걸음을 내딛고 있다. 하이씨씨 제공

일본책 ‘…마음정리법’ 번역한 정선희

정선희가 사라졌다. 1992년 SBS 공채 1기 개그맨으로 데뷔 후 20여 년간 방송가에 발을 붙이고 있던 정선희의 모습을 요즘 방송에서 보기 힘들다. 그런 그를 지난 18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조용한 카페에서 만났다. 반평생을 ‘방송쟁이’로 살아왔건만 잠시 한편으로 물러선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 “이 카페 3층에서 매주 독서 토론회를 갖는다”는 정선희는 요즘 책과 씨름 중이다. 얼마 전에는 일본 준텐도(順天堂)대 교수로 재직 중인 고바야시 히로유키(小林弘幸)가 쓴 ‘하루 세 줄, 마음정리법’을 번역했다. 남다른 일본어 실력을 갖춰 이미 일본어 교재 두 권을 낸 정선희가 처음으로 도전한 영역이다. 아하, ‘방송인 정선희’의 삶에는 잠시 쉼표가 찍혔지만, ‘인간 정선희’의 삶은 새로운 한 줄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지난 4월에 제안 받고 3주간 고민하다가 시작했어요. 자기계발서인데 이 이야기가 저를 설득할 수 있어야 번역을 하죠. 그래서 3주간 원서를 읽으며 고민했어요. 처음에는 엄두가 안 났어요. 책 한 권을 번역하려면 그동안 저자가 쓴 모든 책을 읽고 글의 특징과 뉘앙스를 파악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 책은 행간을 읽어야 하는 수필이나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좀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었죠.”

이 책의 주제는 간단하다. 잠들기 전 세 줄의 일기로 하루를 정리하라는 것이다. 단, 솔직해야 한다. 누구도 보지 않을 나만의 이야기를 재단없이 써야 한다. 욕설도 좋고, 비속어도 좋다. 하루를 정리하며 가슴속 응어리를 고스란히 끌어내 글로 적으라는 것이다. 정선희는 “× 싸듯이, 배설하듯이 적으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일기는 ‘남이 볼 것’을 가정하고 차 떼고, 포 떼면서 써요. 하지만 세 줄 일기는 정말 나만 보는 글이죠.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게 작은 수첩에 쓸수록 좋아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 세 줄로 정리할 수 없다고요? 그 기준을 정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 나를 건강하게 만드는 거죠. 마음이 몸을 다스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 줄 일기를 쓰는 동안 내 몸도 하루를 마감하고 내일을 준비하기 시작해요.”

그렇다면 역자인 정선희는 건강해졌을까? 번역하는 동안에는 건강이 오히려 악화됐다. 새벽에 글을 쓰다 보니 수면 리듬이 깨져 면역 질환에 걸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음의 양식은 얻었으나 머리칼과 시력은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집필을 마치고 세 줄 일기를 규칙적으로 쓰기 시작하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예를 들자면 저는 그날 먹은 것을 써놨어요. 2, 3주마다 검토하는데 유독 밀가루와 커피를 많이 마셨다고 적혀 있더군요. 몸이 안 좋아져서 일기에 적혀 있던 음식을 끊었더니 6개월간 저를 괴롭히던 알레르기 반응이 사라졌어요. 솔직한 나의 일기 속에 문제와 답이 함께 들어있던 거죠.”

이제 그에게 ‘번역가’라는 수식어를 붙여줘야 할까? 그는 “이제 겨우 문고리 정도 잡은 것”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인기 번역가로 인정받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그리 큰 보탬이 되지도 않는단다. 하지만 번역 일은 정선희에게 소중한 것을 알려줬다. 20년간 미친 듯이 매달렸던 방송 일이 아니어도 자신은 충분히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독서 토론회에서 만난 이들의 다양한 삶을 듣는 것도 꽤 흥미롭다. 세상에는 내가 아는 것보다 재미있는 게 많은 법이다.

“이제 ‘독해’와 ‘번역’의 차이를 분명히 알았어요. 독해가 단어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라면 번역은 이야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우리글로 옮기는 작업이죠. 내가 일본어를 ‘잘해서’ 도전한 것이 아니라, ‘잘하고 싶어서’ 도전한 거예요. 제가 번역가라 불리길 원한다면 삶의 100%를 번역에 쏟아붓는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여전히 제게는 방송일도 소중하니까요.”

정선희는 큰 아픔을 겪은 사람이다. 그 아픔을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알고 있어 더 아프다. 자신은 극복한 줄 알았는데 옆에서는 자꾸 ‘괜찮으세요?’라고 묻는다. 여전히 아파야 하는 사람처럼.

하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한 번 정선희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많은 짐을 내려놨느냐”고. 정선희는 답했다. “내가 내린 게 아니라 주변 이들이 짐을 하나씩 덜어줬다”고.

“방송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따분할 때가 있었어요. 주변이 조용하면 불안했죠. 하지만 일을 잘하는 것만큼 잘 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주변에 나를 지탱해 주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알게 됐죠. 모든 것에 감사하고 살 만큼 경건하진 않지만 기분 좋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김영철이 많은 힘을 줬어요. 그 친구는 항상 현재를 이야기해요. 나를 8년 전으로 되돌려 놓지 않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참 사랑해요. 쉬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떠드는 (김)영철이를 보고 있으면 나 역시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이 순간을 내 인생의 이야기이자 역사로 만드는 건 값진 일이죠.”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