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꽹과리 하나만 있으면 밥과 술이 생겨… 내겐 도깨비 방망이지”

‘유랑 藝人’ 60년… 남사당 명인 지운하씨

남사당패의 꼭두쇠(우두머리) 지운하(68) 명인. 최근 예인 인생 60주년 기념 공연을 치렀다. 8세 때부터 부친이 이끄는 풍물패를 따라다녔다. 12세 때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인기상을 받으며 전국 방방곡곡에 이름을 알렸고,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인 신상옥을 만나 스크린에도 등장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인 남사당놀이 이사장을 역임하고, 오랫동안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지도위원을 했다. 화려해 보이지만 애환 많고 굴곡진 유랑 인생이 앞서 있다. 남사당 걸립패로 전국을 떠돌았고, 선운각, 워커힐에서 수십 년 공연을 했다. 누군가는 떠돌이 인생이라고 하지만, ‘유랑 예인’이라는 표현이 걸맞다. 남사당의 산 증인이자, 국악 그리고 풍물의 역사 그 자체다. 지 명인을 지난 15일 인천 계양문화회관에서 만났다.

◇ 악극단, 서커스, 밤무대…연희판 최고의 스타 = “‘연예인병’에 걸려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은 이래도 한때 잘생겼었어. 공연하다 보면 처녀들이 눈길을 보내더라고. 쉴 때는 땀도 닦아주고. 꽹과리 하나만 들고 있으면 어디서든 밥과 술이 생겼지. 그래서 난 저걸(꽹과리를 가리키며) 도깨비 방망이라고 불렀어요.”

지운하 명인은 어느 무대에서든 주목받는 존재였다. 그의 인기는 오늘날 유명 스타 못지않았는데, 이는 남사당과 관련된 수많은 예인들이 증명하는 ‘사실’이다. 김덕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악극단, 서커스, 약장수, 야간업소 밤무대 등 대한민국 연희판 최고의 스타였다”고 회고한다. ‘싹’(?)은 일찌감치 보였다. 지 명인과 김 교수의 첫 만남은 1959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였는데, 이때 이미 지 명인은 인기상을 받았다. 당시 김 교수는 7세, 지 명인은 12세였다.

지 명인은 20세에 결혼한 후 입대를 했다. 군악대 생활을 했는데, 탤런트 한인수, 현석 등과 함께 근무했다. 아내는 종종 어린 딸을 업고 면회를 왔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969년 12월 베트남 파병을 자원했다. “간다는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면회를 온 거야. ‘군악병 가니깐 죽을 일은 없다’고 달랬는데, 가보니까 병과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지 명인은 옆구리에 솔방울만 한 흉터가 있다. 갈비뼈 사이에 총알이 박혔는데, 고립된 상태에서 3일 동안 밥 한 끼 못 먹었다. 중대장이 지 명인을 허리띠로 꽁꽁 묶어놓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칼을 불에 달궈 총알을 빼냈다. 지 명인은 “월남 술을 막 붓고 그랬는데,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지만, 그는 ‘위문 공연’을 해야 한다는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장구가 없어서 시레이션 박스로 장구통을 만들고 판초 우의를 가죽처럼 대신해 즉석 장구를 만들어 연주를 했다. 기발한 착상과 의지가 돋보이는 ‘추억’이다.

◇ 남사당의 산 증인, 국내외 무대를 평정하다 = 군 생활을 마치고, 지 명인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된다.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한 일들이 그에게 서서히 ‘빛’과 ‘길’을 내주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한국민속예술단에 포함되어 해외 공연을 시작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선운각과 워커힐을 통해 남사당 기예를 펼친 것이다. “일본 도쿄(東京)의 큰 극장에서 오페라 형식의 춘향전을 공연했어요. 우리로 치면 패티 김, 이미자 같은 일본 가수가 춘향역과 향단역을 맡고. 거기서 남사당놀이를 한 거지. 김덕수하고, 최종실하고, 지금은 죽은 김용배…. 1972년에 맨 처음 갔는데 인기가 너무 좋아서 앙코르 공연을 하고, 나고야(名古屋), 오사카(大阪), 홋카이도(北海道)까지 갔지. 일본 사람들은 우리를 아주 깍듯이 대우했어요. 심지어 목욕탕 욕조에 물을 받아주고 등까지 밀어줬다니까, 하하.”

남사당패의 일본 공연 총책은 박귀희(1921∼1993) 명창이었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약했고, 1954년 여성국극동지회를 창설한 인물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이며 국악예술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성황리에 일본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지 명인은 새로운 무대로 눈을 돌렸다. 선운각과 워커힐이다. 선운각은 북한산 자락에 1967년에 문을 연 고급 요정이었다.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요정 중 하나였다. 1970년대 한국의 밤거리는 어디나 일본인들로 득실거렸는데 선운각에 와서도 돈을 많이 썼다. 7∼8명이 한 팀이 되어 손님의 방에 들어가 짤막하게 공연을 해줬다. “그때만 해도 우리 국악인들이 설 무대가 별로 없었어요. 아쟁·대금 명인이었던 고 서영석 선생님이 단장이셨고, 김덕수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분들이 단원 활동을 했죠.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아주 유일한 계기였어요.”

◇ 워커힐과의 인연=‘문세광 사건’이 일어나 한·일 교류가 잠시 끊겼고, 일본인 손님들이 찾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워커힐로 갔다. 당시 워커힐에는 김중자무용단이 있었는데, 지 명인은 그 무용팀 단원으로 들어가 함께 안무를 하는 등 기획에 참여하게 된다. 또, 그가 속한 하니비민속예술단 쇼는 당시 국내 최고의 쇼로 워커힐 상품의 대명사였다. 그는 김중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인들과 함께 공연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가수 패티 김이다. 지 명인은 국악을 활용한 공연을 선보였고, 대만 공연에서는 암표가 성행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지 명인은 대만 공연을 끝으로 워커힐을 나왔으나 1982년에 다시 워커힐에 입사, 1999년까지 18년을 근무한다.

워커힐에 다시 들어갈 때엔 혼자가 아니었다. 지 명인을 단장으로 하는 사물놀이패도 함께였다. 82년도 월급이 12만∼15만 원이었는데, 지 명인은 70만 원, 단원들은 35만 원을 받는 조건이었다. 지 명인은 이에 대해 “지운하가 진짜 제대로 신임을 받게 된 때”라고 강조했다. 그가 주관해 남사당 공연도, 안숙선 명창의 공연도 워커힐 무대에 오르게 된다. “5년 동안은 쉬는 날이 하루도 없었어요. 하루에 두 번씩도 공연하고. 일본 공연하고 비행기 타고 와서 다시 저녁 공연에 선 적도 있어.”

당시 유명했던 ‘웃음따라 관광열차’라는 단체와 공연도 했는데, 단장이 바로 송해였다. “무교동에 가면 엠파이어, 무랑루즈, 카네기 같은 업소들이 있었지. 안 다닌 데가 없어. 하루 저녁에 5∼6개를 뛰는데, 양악에 맞춰 국악을 했지. 음악에 맞춰서 열두 발도, 소고도 돌리고. 신중현 씨가 협연하자고 해서 휘모리 가락, 자진 가락을 기타하고 어우러지게도 했어요.”

◇ 수업 중에도 꽹과리 소리만 들려…예인의 꿈 꾸던 꼬맹이 = 60년 유랑인생이 시작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부친 지동옥(1981년 작고) 씨는 농사일을 하며 두레패를 만들어 상쇠(농악대의 꽹과리 제1주자) 역할을 했다. 10여 명의 제자를 길러낸 만큼 이미 인천 지역에서 유명했다. 어릴 때부터 꽹과리 소리가 익숙했다. “수업시간에도 그 소리만 들어오는 거예요. 화장실 간다고 거짓말하고, 하루 종일 풍물패를 따라다녔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도화동 마을 풍물패가 두드리던 농악 소리에 어깨가 절로 덩실거렸다. 지 명인은 밖으로 달려나갔다. 패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 지동옥 씨. 지 명인은 그런 부친의 모습이 더없이 멋있어 보였다고 한다. 4학년이 되자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풍물패를 따라다녔다. “사실은 집 사정도 안 좋았으니까, 워낙 가난했어요. 에라 모르겠다 한 것도 있었지.”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예능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12세에 출전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지 명인이 소속된 풍물패가 전체 2등상을 거머쥐었고, 지 명인은 인기상까지 수상했다. 신상옥 감독을 만나 영화에도 출연했다. “전국대회 공연 끝나고 나오는데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아저씨 따라 제주도 가자’고 했어요. 그땐 제주도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어. 아버지한테 허락받고 신 감독 쫓아 제주도에 갔어. ‘소장수’, ‘메밀꽃 필 무렵’ 등을 찍었지. 한 달이 좀 넘어서 집에 돌아왔어요.”

남사당에 입문한 건 정확하게 1961년, 지 명인이 14세 때다. 그때는 남사당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이다. 따라서 당시 입문이라고 하면, 같이 순회공연을 하는 걸 의미한다. 남사당패에 입문한 후 지 명인은 시장에서 걸립(乞粒·각처로 다니면서 풍악을 치고 재주와 익살을 부려 돈이나 곡식을 얻는 일) 공연을 많이 했다. 열심히 공연하고 나면 구경꾼들이 상모에 돈을 넣어 준다. “돈을 걷은 다음에는 절대 화장실도 가지 못해. 혹시 돈을 가지고 도망갈까 봐 같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돈은 선생이 관리했는데, 만약 몸을 털어 돈이 나오면 엄청나게 혼이 났어요.”

남사당 회원들은 생계의 이유 때문에 걸립을 다녔는데, 지 명인은 당시 김복섭 걸립패와 함께 주로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를 다녔다. 도서 지역에 가면 보통 보름에서 스무날을 머물렀다.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공연을 할 때도 있지만, 각 가정을 돌며 덕담 고사를 할 때도 많았다. 그러고 나면 집주인이 상을 차리는데, 상에는 쌀과 돈이 올라온다. 호응이 좋으면 버나, 벅구, 무동춤, 광대공연, 땅재주 등 다양한 공연도 펼쳤다. 모든 돈과 쌀은 각자의 역할에 맞게 분배했다고 한다. 인천지역의 걸립패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는데, 지 명인의 경우엔 1969년 입대를 하며 자연스럽게 활동이 줄었다. 부친이 만든 지동옥 걸립패도 이 무렵 자취를 감췄다.

◇ 다시 고향 품으로… 아들도 남사당패 = 1999년 워커힐에서 나온 후 지 명인은 국립국악원 최고지도위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1990년대 남사당놀이 보존회 단장으로 활동하는 등 그동안 쌓아온 업적을 국가 기관에서 인정해 준 덕분이다. 남사당 유랑생활과 선운각, 워커힐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였다. 특히 지 명인은 대중화에 신경을 썼다. “상설공연과 지방, 외국 공연까지 1년에 200회 이상 공연을 했어요. 동북 3성은 물론이고, 러시아 쪽으로 해서 북유럽, 모스크바에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등. 공연도 하고 사물놀이도 가르쳤죠.”

지 명인은 공연도 기억에 남지만, 해외 동포들에게 국악을 지도하는 일이 무척 보람 있었다고 회고한다. 신명 나는 우리 가락·장단에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국악원 재직 중 2005년 50주년 기념 공연을 하게 됐다. 그동안 먹고 살기도 힘들어 개인 발표회는 꿈도 못 꿨는데 환갑 무렵에 드디어 개인 공연을 하게 된 거다.

2007년 국립국악원에서 정년 퇴임한 그는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이며, 현재 계양문화회관 풍물단의 예술감독직을 맡고 있다. 지 명인은 2011년 남사당보존회 이사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는데, 외부 인력이 아닌 남사당 내부에서 이사장이 된 것은 처음이다. 국악 강습과 풍물 캠프 등을 운영하며 지역민과 청소년들에게 국악과 남사당놀이를 알려주면서 함께 ‘놀고’ 있다. 부전자전. 대기업에서 경호 일을 하던 아들이 50주년 기념 공연을 보고 ‘아버지 뒤를 따르겠습니다’하고 남사당에 들어왔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