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경제, 사회적 기업 1000개 시대>장애인들에 ‘쓰고 그리는’ 기쁨 선사… 문화적 경험 넓혀줘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1월 열린 오픈스튜디오에서 그립플레이가 장애인을 대상으로 보조 필기구 제작을 위한 손 모양을 프린트하고 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보조 필기구 제작을 위해 만든 손 모양 주물. 그립플레이 제공

장애인예술단서 미술 가르치며
보조기구 필요성 느껴 창업 결심

기존기구는 95% 美·日등서 수입
체형 안맞아 불편·AS도 어려워

주물 대신 3D프린팅 도입으로
제작비 절감·개인별 맞춤 생산

“경험이라는 건 한 사람의 세계를 확장해 줍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필기하는 것은 일반인에겐 쉬운 일이지만 신체 장애로 그런 경험을 하기 힘든 이들에게는 엄청난 소외가 될 수 있습니다. 2014년 창업한 그립플레이는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장애인 필기 보조 기구를 제작하는 사회적기업입니다. 기술을 통해 소외된 이들의 경험을 확장하는 것, 그것이 그립플레이의 사회적 목적입니다.”

2014년 창업한 그립플레이는 2014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에 선정됐고, 올해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인큐베이팅 기업에 뽑히기도 했다. 필기 보조 기구는 혼자 힘으로 펜을 잡기 힘든 장애인들을 위한 필수품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체형에 맞게 맞춤 제작을 해야 해 시장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는 평가가 있었다.

2013년부터 장애아동 학습보조기구 지원 법령에 따라 학교에 장애아동이 있는 학교는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장애보조 기구를 구입해야 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국내에서 생산되지 못하고, 95% 이상이 미국, 핀란드, 일본 등으로부터 수입돼왔다. 이 때문에 배송기간이 3∼4주 이상 걸리고, 우리나라 사람과는 맞지 않는 체형과 장애 유형 탓에 사용 시 불편함이 컸다. 고장이나 파손 시 AS 서비스도 어려웠다.

이준상(32) 그립플레이 대표는 지난 24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존에는 일일이 주물을 떠서 찍어내야 해 제작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신기술인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하면 고품질 보조기구를 더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질 좋은 필기보조 기구를 제작해 우리나라 장애인들에게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제작 방식은 비교적 간단하다. 3D 스캐너를 이용해 사용자 손의 데이터를 컴퓨터로 전송한다. 인체공학 기술을 이용해 제품을 설계한 뒤 3D 프린터를 이용해 제품을 출력한다. 그립플레이는 여기서 더 나아가 3D 스캐너 없이 일반 카메라로 사용자의 손을 촬영해 그 데이터를 컴퓨터로 전송하는 소프트웨어도 개발 중이다.

이 대표가 그립플레이를 시작한 데는 2011년 서울형 사회적기업 ‘한국장애인국제예술단’에 입사한 것이 계기가 됐다. 2년 동안 예술단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장애를 가진 이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장애보조 기구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장애 보조 기구는 장애인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고, 그 중에도 필기 보조 기구의 중요성이 컸다. 쓰고 그리는 것은 한 개인의 일생에 무엇보다 큰 영향을 주는 행위여서다. 그런데 기존의 필기 보조 기구는 투박하고 개개인의 손에 딱 맞지 않아 장애인들이 사용에 불편함을 겪었다. 자연스레 필기를 꺼리게 되니, 교육 불균형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다.

이 대표가 장애인 문제에 더욱 관심을 둔 건 그의 성장 과정과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이 대표의 아버지는 이 대표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됐다. 이 대표는 “저 역시 장애와 멀지 않은 삶을 살았고, 기초생활수급자로서 사회의 도움을 받았다”며 “소외계층에게 무엇보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 사업을 하면서 힘들 때가 많지만, 스스로의 경험은 이 길을 포기하지 않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신기술로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의미 있게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현재 서울형 예비 사회적기업 등록을 준비 중인 그립플레이는 아직 본격적인 생산·판매를 하는 단계는 아니다. 앞으로 주요 수요자가 될 장애인들에게 그립플레이의 제품을 홍보하고, 필요성을 알리는 활동에 주력 중이다. 이 일환으로 특수학교 등을 순회하면서 ‘오픈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장애 학생 한 명 한 명의 손 모양을 프린트하고 치수를 재서 필기 보조 기구를 제작한다. 보조 기구를 이용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미술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오는 2월에는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그립플레이의 필기 보조 기구를 이용해 장애 아동들이 그린 미술작품을 선보이는 전시회가 열린다. 3D 프린터를 싣고 전국의 장애인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한 홍보 활동이 결실을 보는 자리다. 그립플레이는 내년부터 본격적인 생산과 판매에 나설 예정이다. 그립플레이는 필기 보조 기구 제작 외에도 가상현실(VR) 기술을 이용한 장애인 문화 복지 사업도 기획 중이다.

이 대표는 “거동이 불편하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피카소전을 보기 어렵고,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할수록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지게 된다”며 “이런 문화격차를 줄이기 위해 3D 스캐닝 기술을 이용해 가상 공간에서 명화와 예술 작품을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주 기자 everywher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