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닥의 화가’ 정창섭

  • 문화일보
  • 입력 2016-03-1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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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 논설위원

‘그리지 않은 그림’. 한국 현대미술 제1세대로, 한국 고유의 세계적 현대미술 장르 ‘단색화(單色畵)’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인 정창섭(1927∼2011) 화백 작품을 두고 흔히 하는 표현이다. 한지(韓紙) 재료인 닥나무 속껍질을 묽게 반죽해 화폭 위에 놓고 손으로 주무르고 두드려서 편 뒤 물기를 말림으로써 닥 자체의 미감(美感)이 드러나게 하는 식의 창작 과정 때문이다. ‘닥의 화가’로 일컬어지며, 한지와 추상미술을 결합한 독창적 예술 세계를 구축한 그는 생전에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지는 한국의 문화 속에서 오랜 세월의 연륜과 더불어 한국적 삶의 정서와 미(美) 의식이 내밀하게 배어 있는 재료다. 우리의 조상은 창호지의 문을 통해 대기의 광풍은 물론, 시간의 추이를 분명하게 체험하며 ‘안’과 ‘밖’의 두 세계를 공유했다. 나의 닥 작업은 전 과정을 통해 종이의 재질 속에 나의 숨결과 혼과 체취가 녹아들어 마침내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장작불을 지펴 온도를 가늠하며 도자기를 구워내는 도공처럼, 나를 잊어버린 경지에서 잔잔한 행위의 잔상들을 통해 내 마음에 번지는 내밀한 형상들을 만나게 된다. 일체의 지식과 의도성을 벗어버린 채, 장인(匠人)처럼 닥을 통해 또 하나의 ‘나’를 만나려 하는 것이다.”

1951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낙조(落照)’로 특선 입상해 등단한 그가 한지를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한지의 번짐 효과를 유화에 활용한 작품 ‘귀(歸)’ 연작, 1980년대엔 닥 반죽을 편 ‘저(楮)’ 연작, 1990년대부터는 색깔을 넣으면서도 사각형 등을 통해 금욕주의적 정신성이 더 두드러지게 한 ‘묵고(默考)’ 연작으로 작품의 깊이를 더해갔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 등이 만나고 섞이는 물아합일(物我合一)의 세계를 추구했던 그는 “화강암 표면처럼 모든 흔적과 얼룩과 우연을 통해 ‘물질’ ‘시간’ ‘자아’ 그리고 ‘자연’을 만나게 되는 것, 그것이 나의 바람”이라고도 밝혔었다. 그런 그의 5주기(週忌)를 맞아 대표작 30여 점을 보이는 유작전이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지난달 26일 개막, 오는 27일까지 계속된다.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참선(參禪) 상태에 빠져드는 느낌”이라는 그의 작품 앞에서 마음이 차분해지는 경험을 갖는 것은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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