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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로벌 에세이 게재 일자 : 2016년 05월 04일(水)
‘無國籍者’ 이승만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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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뤼시 호텔의 현재 모습.
최경림 / 駐제네바대사, 유엔인권이사회 의장

스위스 제네바를 가로지르고 있는 레만 호수 남단에서 북단으로 이어진 몽블랑 다리를 건너다보면 처음으로 마주 보이는 건물이 예전에 뤼시 호텔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1933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임시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수개월 머무르면서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을 상대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의 부당성과 대한민국의 독립 필요성을 설파했던 역사적 장소이다. 아울러 당시 우리 나이로 환갑에 가깝던 이 전 대통령이 30대 초반의 오스트리아 여성인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를 처음으로 만난 곳이기도 하다. 매일 이 앞을 지나다니는 필자에게 드는 생각은 이러한 세기의 로맨스보다도 망국(亡國)의 외교관에 대한 깊은 연민이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서 기세등등하던 일본을 홀로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비애를 더하는 것은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무국적자였다는 점이다. 일제가 1912년 ‘조선민사령’을 공포해 호적제도를 도입하자 많은 독립운동가가 등록을 거부하고 무국적자를 자처했다. 추후 활동상 편의 등을 이유로 김구 선생이 중국 국적을, 안창호·서재필 선생 등이 미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이 전 대통령은 ‘조국이 없는데 무슨 국적이냐’면서 계속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다. 이 전 대통령은 미국 시민권을 따라는 미국 정부의 권유를 뿌리치는 대신 미국에서 비정규 여권을 발급받았는데, 국경을 넘을 때마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무국적자 문제는 80여 년이 지난 2016년 현재에도 제네바에서 뜨겁게 논의되는 문제 중 하나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약 1000만 명의 무국적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무국적자는 국적법상 충돌, 정치적 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발생한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어딘가에 속할 권리(right to belong)’를 거부당한 이들은 여권이나 투표권도 없고, 교육이나 의료의 혜택도 누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자유로운 이동이나 합법적인 고용도 이들에게는 남의 얘기일 뿐이다. 상당기간 무국적자 신세를 경험한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무국적자는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없는 사람들이다”면서 무국적자의 비참함을 설명한 바 있다.

유엔도 인권 차원에서 무국적자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 2014년 유엔은 ‘1954년 무국적자의 지위에 관한 협약’ 채택 60주년을 기념해 2024년까지 전세계 모든 무국적자에게 국적을 부여하자는 ‘나는 소속돼 있다(I belong)’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는 약 180명의 무국적자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무국적자들의 특성상 파악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무국적 아동들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정부도 인권과 사회 안정 측면에서 무국적자 문제를 인식, 무국적 아동들의 경우 일정한 조건하에 의무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정비한 상황이다. 그러나 멀쩡히 살아 숨 쉬면서도 투명인간처럼 살아야 하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신산할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국적자 문제는 현행 국적법상 규정이나 국민적 정서 등으로 인해 당장 해결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시작해보면 어떨까. 무국적 아동 문제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라 모든 아동은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고, 세계인권선언, 국제인권협약 등 인권규범들은 아동의 인권 보호를 최우선시할 것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무국적 아동 문제 해결도 좋고, 다른 나라의 무국적자 문제 해결을 도와주는 것도 좋다.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2016년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오늘 제네바에서 83년 전의 한 무국적(無國籍) 외교관을 떠올리며 드는 생각들이다.


◇최경림(59) △제16회 외무고시 △주미국2등서기관 △주제네바1등서기관 △세계무역기구과장 △주제네바참사관 △자유무역협정제1교섭관 △자유무역협정정책국장 △주브라질대사 △자유무역협정교섭대표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차관보 △주제네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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