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배신 걱정돼도 후계群 키워야 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용식 / 논설주간

한 달 전 총선에서 제2당으로 전락한 새누리당은 여전히 공황 상태다. 야권 인사 영입 주장에서, 작은 야당으로 가 그곳에 새 누리를 짓자는 ‘뻐꾸기 발상’까지 나돈다. 비상대책위원회와 혁신위원회를 꾸리기로 했지만 국민 기대와는 딴판이다. 대통령 선거는 아직 멀고, 제20대 국회의원 임기는 대선 이후까지여서 당선인들도 절박할 이유가 없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그나마 혁신 몸부림을 친 것도 총선이 임박하면서 공멸 위기감에 쫓겼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내부에서 진행 중인 논의를 보면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여당 차원의 혁신 여부와는 별개로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한 번 나서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 정권 재창출은 대통령의 중요한 책무이기 때문이다. 특히, 5년 단임제를 보완하려면 유사한 국정 기조의 대통령이 2∼3명 ‘릴레이’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 외에는 실질적 수단을 가진 사람이 없다.

보수 정당사(史)를 돌아보면, 지금처럼 구심력이 약한 때가 없었다. 정권 말기에는 언제나 ‘차기’라는 새로운 중심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 때 노태우, 노태우 정권 때 김영삼, 김영삼 정권 때 이회창, 이명박 정권 때 박근혜가 그들이다.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 정권 때는 노무현과 이인제, 노무현 정권에는 정동영이 있었다. 모든 역대 대통령들이 후계자 군(群)을 키워 왔음을 의미한다. 물론 한결같이 ‘정치적 배신’을 당했다. 그래도 유사한 가치를 추구하는 정권의 존속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박 대통령은 이런 전통에서 예외에 속한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중간 보스를 싫어하니 후계자는 언감생심이다.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영향 탓일 수도 있다. 퍼스트레이디 대행을 하던 1970년대 후반에는 2인자 경계가 더 심했다. 결국 권력의 막후에서 비공식적 권력 투쟁이 피비린내 나게 전개됐다. 지금 박 대통령 주변에도 측근 실세들이 충성을 가장해 후계자의 싹을 자르려 한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도 박 대통령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언제나 민심을 따르고 선당후사(先黨後私)를 택했다. 2004년에는 ‘천막 당사’ 정신으로, 2011년 말엔 비대위원장을 맡아 당을 구했다. 2012년 대선에서 판세가 심상치 않자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불가피한 선택’이라던 소신을 접고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켰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제 세 번째로 구당(救黨)에 나서야 할 형편이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한계가 있겠지만 ‘집권 프리미엄’을 활용해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현재 여권의 차기 후보군은 궤멸됐다. 김무성은 2선 후퇴했고, 김문수·오세훈·안대희는 낙선했다. 김황식·정몽준은 서울시장 선거 와중에 물러났고, ‘친박 좌장’ 최경환도 나서기 어렵다. 7용(龍)은 고사하고 가위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신세다. 정권 도전의 희망이 없는 정당은 불임 정당으로, 존재할 이유조차 없다. 유력 후보가 하늘에서 떨어지진 않는다. 세대교체도 잘 되면 좋지만 요행에 기댈 수는 없다. 박 대통령이 위축된 후계 그룹에 적극적으로 역할을 맡기고, 정치적으로 키워야 하는 이유다.

한때 경쟁자였거나 껄끄러웠던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정부 요직에 기용한다면 에이브러햄 링컨을 위대하게 만든 ‘경쟁자들의 팀(Team of rivals)’이 될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차기 후보로 만들었다. 총리든, 장관이든, 여당 쪽의 중책이든, 이들을 활용하면 레임덕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 이들이 자기 정치를 할 우려도 없지 않지만 한 차례 낙마한 만큼 그리 사납게 대들진 못할 것이다. 박 대통령이 이들의 견제와 균형을 유도하기도 어렵지 않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까지 영입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다. 박 대통령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고 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는 여전히 역대 대통령들에 비해 좋은 편이다. 새누리당 지지도 역시 야당들보다 높다. 다만, 차기 대선 후보 지지율은 형편없다. 야권과의 협치(協治)도 해야 하지만, 여권 내 협치도 중요하다. 후계 그룹 경쟁을 통해 이들의 역량을 검증하고 국민의 관심과 기대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