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육상과 영업은 똑같아… 연습하지 않으니 ‘길’ 안보이더라”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육상 금메달리스트인 김봉유 ㈜골든블루 상무이사가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사무실에서 골든블루의 신제품인 블렌디드 화이트 위스키 ‘팬텀 더 화이트’를 꺼내 보이며 영업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왕년의 육상스타서 위스키 회사 임원으로 … 김봉유씨

86아시안게임 3관왕인 임춘애(46) 선수가 라면 먹고 뛰어 우승했다는 헝그리 정신(임 씨는 2010년 4월 16일 자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그 얘기는 와전됐다”고 재차 못을 박았다.)이 여전히 회자되던 1990년 10월 3일 베이징(北京)아시안게임. 한국 육상계는 또 하나의 깜짝 스타를 배출한다. 800m 부문에서 김봉유 선수가 1분49초48의 기록으로, 언론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금메달을 따낸 것. 2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뭘 하고 있을까. 우리 나이로 이제 50이 된 김 선수는 잘 나가는 한 위스키 회사의 영업담당 임원으로 변신해 있었다.

지난 23일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의 한 고층빌딩 10층에 자리한 ㈜골든블루 사무실에서 만난 그의 직책은 영업1본부장(상무이사). 뱃살이 하나도 없었다. 신장 177㎝, 체중은 68㎏. 탄탄해 보였다.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고는 어려울 터이다.

김 상무에게 “정말로 느닷없이 솟구친 신예 스타였느냐”고 다소 직설적으로 물어봤다. 그는 잠깐 웃더니 “아시안게임 이전에 국제대회 출전 경험이 대만 오픈대회 외에는 하나도 없었으니 무명이란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시안게임 이전에 당시 육상 일인자로 제일 잘 뛰었던 유태경 선수를 앞서면서 우승 기대주로 주목받으며 알음알음 조명을 받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자신감도 있었다”고 반은 인정하고 반은 ‘수정’했다.

달리며 인생 전반을 살고 위기를 극복하면서 다시 영업에서 촌각을 다투며 멋진 후반부를 기약하고 있는 그의 삶. 위스키를 혀 안에서 굴리듯 한 번쯤 우리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줄까, 음미해볼 만하다 싶었다.

김 상무의 그리 크지 않은 집무실을 살피니 현재 업(業)이 말해주듯 벽면 한쪽의 진열장은 온통 술과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골든블루의 다소 촌스러운 초창기 제품부터 최근 나온 세련된 ‘팬텀 더 화이트’까지. 위스키 시장에서 가장 치열한 다툼이 벌어진다는 수도권 영업 ‘사령탑’으로서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최근 갓 나온 경쟁사인 W사의 제품도 있었다. 마셔봤느냐고 물었더니 “맛도 좀 보고, 나름 테스팅하느라 가져다 놨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아니냐”고 했다. ‘설득의 심리학’,‘위험관리가 회사의 미래를 결정한다’,‘민사집행과 채권관리’,‘이종기 교수의 술 이야기’,‘1등 기업의 비밀’ 같은 책도 손때가 묻어 있어 그의 관심사를 엿보게 했다.

강원 평창이 고향인 김 상무가 육상에 뛰어든 건 우연한 계기였다. 평창군 대화면 대화중학교 3학년 때 교내 체육대회에서 자신도 모르게 내재해 있던 빼어난 실력을 보인 게 당시 체육교사의 눈에 띄었다. 대화고를 거쳐 관동대에 체육특기자로 입학했다. 고교 3학년 때 6월에 도 대표를 하고 8월에 전국 대회에서 3위를 하면서 체육특기자로 뽑혔다. 체육특기자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전국 대회 3위 내에 들어야 했다.

“대학에 가기 위해서 나름으로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웃음) 코치도 없는 시골학교에서 제가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거든요. 대학에 가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으니 확실히 성적이 일취월장했습니다. 대학 1학년 때는 2∼3등을 하곤 했는데 3학년 때 1500m에서 유태경 선수를 이기고 1등을 했어요.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군 면제 혜택도 받았고요.”

그의 우승은 시골 고향 마을을 그야말로 들었다 놨다 했다. TV에 우승 장면이 나오면서 모친은 머리 위까지 손뼉을 치며 대견해 했고,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국회의원에 기관장이 방문해 격려하면서 주민들까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여세를 몰아 1991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준우승했고 1992년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을 제패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선탈락. 한국신기록을 세웠는데도 세계 중거리 육상의 벽은 한참 높았다. 설상가상으로 선수 생명에 치명적인 부상까지 찾아왔다.

히로시마(廣島)선발전을 앞두고 동계훈련 도중 무릎 인대를 다쳤다. 강도 높은 훈련을 견뎌내지 못했고 속도를 낼 수도 없었다. 실의에 빠져 훈련도 거의 하지 못한 채 1994년 은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은퇴하고 나니 선택 하나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시·군청팀에 입사하면 봉급은 많이 주는데 계약직이에요. 실업팀은 봉급은 적은데 정규직이더라고요. 안정적인 게 낫다 싶어 진로소주 실업팀에 들어가서 주류 영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 열심히 영업하며 인정도 받았는데 갑자기 육상연맹에서 연락이 왔어요. 감독을 맡아 달라고요.”

1998년 1월에 감독으로 복귀한 그는 지도자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자신의 주특기인 800m 부문에서 1, 2등, 1500m에서 2등이란 알토란 같은 수확을 했다.

이후 2000년에 다시 주류 영업 현장으로 돌아왔다. 미련은 없었을까. 그는 “최선을 다해 선수생활을 했고 후배들도 잘 가르쳤다고 생각했다”며 “육상은 정해진 일정, 구간에만 맞춰 움직이는데 주류 영업은 이리저리 걸으면서 역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고 화려한 네온사인이 모두 잠재고객이고 뚫을 수 있는 거래처다 싶으니 재미도 더 느꼈다”고 말했다.

지도자의 길 대신 주류영업의 고삐를 죄기 시작한 김 상무는 육상과 체육을 주류 영업에 ‘접목’하는 혁신적 발상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한때 100여 명, 지금도 40여 명이 꾸준히 활동하는 ‘골든블루 마라톤 동우회’를 조직해 감독을 맡아 주류 공급처와 끈끈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실전과 이론이 결합한 그의 지도 성과는 놀라울 정도. 현역 육상감독 못지 않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꿈의 기록대인 3시간 내 진입자를 5명이나 배출했단다.(국내에서도 채 700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마라톤뿐 아니라 106명이 가입해 있는 ‘골든블루 산악회’도 영업은 물론, 그와 인연을 맺은 이들의 체력을 든든하게 지켜주자는 취지로 결성한 양대 축이다. 마라톤 동우회와 산악회에 소속된 이들은 골든블루의 초창기 저변을 확대하고 매출을 견인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든든한 우군이 됐다. ‘36.5도의 저도 위스키’는 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졌고, 가짜가 없는 위스키란 확신을 심어 줬다고 한다. 수도권에 자리한 1500여 곳의 골든블루 고객 업소를 관리하는 원천적인 힘이 되고 있다.

김 상무는 지금도 쉴새 없이 실제 달리고 영업 현장을 뛴다. 1년에 2번씩 마라톤 풀 코스에 도전하고 1개월에 한번은 하프 코스를 질주한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지난 4월에도 대회에 출전해 1시간19분39초의 기록으로 하프코스에서 우승했다.

이런 열정은 인생의 목표도 바꿔 놓았다. 골든블루가 1등 위스키 업체로 도약하기로 정한 2020년까지는 개인적인 욕심도 버렸다. 1위를 하겠다고 선포했으니 사력을 다해 영업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한때 위스키 원액 대금을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운영이 어려웠던 회사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만큼 중추적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25명의 영업직원과 수도권 영업을 총괄하는 그에게 회사는 전문성을 살려 또 하나의 중책을 맡겼다. 지난 3월 위스키 업계 최초로 창단한 ‘골든블루 골프단’의 단장이다.

“육상, 달리기나 마라톤, 골프, 영업이 똑같다고 생각해요. 연습하지 않으면 내 걸음이 아니죠. 영업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금방 바닥을 드러내잖아요. 나를 기억할 수 있게끔 자주 찾고 연락하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실적이 나오죠. 운동이나 영업이나 언제든 슬럼프가 오는데 이를 의식하지 않고 연습하고 단련하면 다시 턴어라운드를 할 수 있지만 포기하면 낙오일 뿐이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전 체력이 다하는 날까지 제가 자부심을 지닌 골든블루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생각이에요.”

인터뷰를 마친 김 상무는 고객과 약속이 있다며 수첩을 챙기더니 서둘러 총총걸음을 쳤다. 그의 뒷모습에서 트랙이 아닌 이젠 영업부문에서 또 하나의 성공신화를 쓰겠다는 각오가 짙게 배어났다.

인터뷰 = 이민종 차장 (경제산업부) horiz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