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구조조정 주역들, ‘정치 복면’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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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용 / 논설위원

박근혜정부의 지루한 구조조정 여정(旅程)을 지켜보면서 궁금증 하나가 생겼다. 경제 현실을 보나, 국민적 공감대로 보나 지금처럼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농익은 때도 없었다. 한데 왜 이토록 지리멸렬할까?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구조조정 지연 땐 성장률이 더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통령은 “수술이 무섭다고 안 하고 있다간 죽을 수 있다”며 의지를 내비쳤다. 야당 대표도 과감한 추진을 주문했다. 언론도 속도가 더디다고 연일 닦달한다.

사공이 많은 만큼 그 진단도 여러 갈래일 테지만, 구조조정 주역들의 태생적 한계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구조조정의 대원칙은 ‘경제 원리에 따라 죽일 기업은 죽이고, 살릴 기업은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 논리가 판치면 필패다. 그러잖아도 정관(政官) 유착으로 매번 구조조정이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이번 구조조정 한복판엔 ‘정치인’들만 넘쳐 난다. 주역 다수가 정치에 발을 담근 데다 경제 현장 경험도 전무한 ‘칠삭둥이’ 경제통들이다. 실전(實戰) 전문가는 임종룡 금융위원장 정도다. 박 정부의 구조조정이 싹부터 노랬다는 얘기가 나올 만도 하다. 수술 환자 앞에 외과의는 없고 집도를 한 적이 없는 다른 의사들만 잔뜩 모여 있는 꼴이다. 실력이 좀 있다는 의사는 의료 사고가 두려워 수술실 주변엔 얼씬도 않는다. 게다가 여소야대 정국 이후 세상만사를 정치 논리로 재단하는 ‘정치만능주의’까지 득세해 그들의 운신 폭은 더 좁아지고 있다.

조선·해운 구조조정 사령탑 군(群) 면면을 들여다보자. 최일선 당사자인 산업은행 이동걸 회장부터 보자. 산은은 이번 성패를 가늠할 대우조선해양의 최대 주주이자 주 채권은행이다. 그는 은행맨이지만 지난 대선 때 금융인의 박근혜 지지 선언을 주도한 대구·경북(TK) 출신 친박계 인사다. 이덕훈 수출입은행장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과 우리은행장 등을 지낸 금융통이나, 박 대통령이 나온 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인 ‘서금회’멤버다. ‘폴리뱅커’들이 사심 없이 소신껏 구조조정을 해낼지 의심이 든다.

유일호 경제부총리의 대표 이력은 ‘재선 국회의원, 국토교통부 장관, 조세연구원장’이다. 경제학 박사라지만 현장에서 손에 피 묻힌 적이 없는 학자형 ‘2세 정치인’이다. ‘순둥이’인 그가 “명운을 걸겠다”고 외친들 시장은 시퉁하다. 청와대 참모도 도긴개긴이다.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은 ‘대학교수, 한국재정학회장, 초선 의원’을 거쳤다. 강석훈 경제수석 이력도 판박이다. ‘머리는 경제인, 발은 정치인’인 ‘폴리페서’다.

산업통상자원부 주형환 장관과 관계자들의 행보는 열혈 전사의 사기마저 꺾는다. 이번 구조조정은 부실기업에 부실 산업까지 해결해야 하는 국가 경제 개편 프로젝트다. 그런데도 일부 산업부 관계자들은 “우리 관할이 아니다” “잘못하면 통상 마찰을 부른다”는 등의 면피 발언만 되뇐다. 주 장관은 이 와중에도 구조조정 현장과는 거리가 먼 아프리카로 날아가 대통령 곁을 지키고 있다.

무불간섭(無不干涉) 국회의원들은 구조조정 여건을 최악의 상황으로 내몬다. 상시 청문회를 열어 책임을 따지겠다고 겁박(?)하니 당사자들은 두더지처럼 땅속으로 숨으려 들기만 한다.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기도 전에 현장으로 몰려가 칼춤도 춘다. 한껏 고무된 노조는 구조조정의 당위성·심각성은 망각한 채 억지 요구를 남발한다.

지금 구조조정은 실기(失機) 직전이다. 그렇다고 멈춰선 안 된다. 더 이상 늦춰지면 살아 있는 기업도 죽게 될 판이다. 이제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아프리카·프랑스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즉시 구조조정부터 챙겨야 한다. 정부의 큰 그림도 국민에게 확실히 제시해야 한다. 주역들을 독려해 심기일전·결자해지토록 해야 한다. “책임은 내가 지겠다”며 이들의 등도 두드려줘야 한다.

외환위기 직전 외국인 투자자들은 우리가 진정 개혁할 역량과 의지가 있는지 지켜봤다. 하지만 금융개혁입법이 실패하자 곧장 투자금 모두를 빼갔다. 이게 기폭제가 돼 환란이 터졌다. 이번에도 세계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구조조정 주역들은 당장 ‘정치 복면’을 벗어 던지고 살이 터지고 피가 튀는 전쟁터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번만은 경제 원칙에 입각한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대한민국도 연명(延命)하다 청산(淸算)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