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웹 | 지면보기 PDF | 기사 상세 찾기 | 2017.10.19 목요일
전광판
Hot Click
문화일반
[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6년 06월 08일(水)
‘경사각 문턱값’ 넘어서면… 산불·지진·인류 멸종 부를 수 있다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김범준의 과학 이야기 - ⑭ 쌀 한 톨의 물리학

방바닥에 넓은 종이를 한 장 깔고 쌀알을 한 줌 집어 종이 가운데에 한 톨씩 떨어뜨리자. 쌀알이 모여 작은 언덕이 생긴다. 봉우리 꼭대기에 쌀알을 계속 천천히 하나씩 떨어뜨리면 작은 쌀의 산은 점점 높아진다. ‘쌀산’을 옆에서 보면 이등변 삼각형 모양이다. 처음 야트막한 언덕일 때는 경사각이 작지만, 점점 봉우리가 높아질수록 경사각은 커진다. 물론 쌀 절벽이 우뚝 솟을 정도로 경사각이 마냥 계속 커지지는 못한다. 가끔은 떨어뜨린 쌀 한 톨이 눈 덮인 산의 눈사태처럼 커다란 ‘쌀사태’를 일으켜 봉우리의 높이를 낮추어 경사각이 줄어들고는 한다. 쌀사태로 무너져 내려 줄어든 경사각은 계속 쌀을 한 톨씩 떨어뜨리면 또 조금씩 커진다. 다음 쌀사태가 나기 전까진. 믿어지는가. 별것 아닌 애들 장난 같은 이 사고실험이 20세기 말 물리학계를 뒤흔들어 큰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

이 쌀사태 실험(처음 제안한 과학자들은 쌀알이 아니라 모래알을 이용한 모래사태 실험을 생각했다. 어차피 사고실험인데 모래사태나 쌀사태나 콩사태나 다 마찬가지지 뭐)을 과학자들이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한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경사가 급하면 쌀사태가 나 경사각이 줄고, 경사가 완만하면 이후 쌀알이 점점 쌓여 경사각이 커져 사태가 일어나는 경사각에 자동으로 ‘저절로 도달한다’는 사실이다.

놀이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소는 다르다. 시소 왼쪽에 아이가, 반대쪽 끝에 아빠가 앉아 있다 해보자. 당연히 아빠가 무거워 처음에는 아빠가 앉은 오른쪽이 바닥에 닿아있다. 아빠가 움찔움찔 조금씩 앞으로 이동해 결국 시소 양쪽의 균형을 맞춘 다음에야 둘이서 시소를 재밌게 탈 수 있다. 아빠가 앞으로 한 번에 10㎝씩 다가오다 보면 결국 시소가 기울어 아이가 탄 쪽이 내려온다. 어, 아빠가 너무 많이 다가갔군. 아빠가 10㎝를 뒤로 되물리면 이제는 다시 아이가 올라간다. 세심한 아빠는 물러난 다음 이제 5㎝만 앞으로 움직여 본다.

이처럼 시소의 균형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아빠가 앉아야 할 위치에는 ‘문턱값’이 있다. 아빠가 문턱값을 넘어서면 아이 쪽이 내려오고, 문턱값에 못 미치면 아이의 발은 공중에 떠있다. 정확한 문턱값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빠의 세심한 마음과 세심한 위치의 조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말이다. 쌀사태 실험은 전혀 다르다. 쌀사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경사각의 문턱값에 도달하기 위해서 시소와 같은 세심한 조정은 전혀 필요치 않다. 그냥 눈을 질끈 감고 쌀을 한 톨씩 계속 떨어뜨리기만 해도, 경사가 너무 급하면 쌀사태가 일어나 쌀산은 스스로 경사각을 줄이고, 경사각이 작으면 한동안은 저절로 경사각이 커진다.

즉, 쌀산의 경우는 시소와 달리, 아슬아슬한 경사각의 문턱값에 그냥 ‘스스로 저절로 도달한다’. 누군가가 세심하게 조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산불이 일어나 번지는 사고실험도 쌀사태와 비슷하다. 이리저리 가끔 떨어지는 벼락으로 자연 발화하는 울창한 숲을 떠올려 보자. 숲을 이루는 나무의 밀도에도 문턱값이 있다. 나무가 너무 많아지면 자연발화로 큰 산불이 나 나무의 밀도가 저절로 줄고, 산불이 난 후 시간이 흐르면 또 나무가 자라 울창한 숲이 되니 나무의 밀도는 작은 값에서 점점 커지게 된다.

생각해 보면 산불 사고 실험의 나무 밀도가 바로 산사태 실험의 경사각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불에 관한 흥미로운 다른 얘기도 있다. 만약 작든 크든 모든 규모의 산불을 막겠다고 불이 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 불을 진화하면, 결국 나무로 빽빽이 들어찬 울창한 삼림이 된다. 마치 쌀알을 그냥 떨어뜨리지 않고 온 정성을 다해 조심조심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춰 절벽이 되도록 높이 쌓아올린 것처럼 말이다. 외부의 아주 작은 충격에도 이런 불안한 쌀산이 통째로 무너지듯이, 산불 감시원이 잠깐 한눈 파는 사이 떨어진 벼락으로 발화가 어쩌다 일어나면, 과도하게 밀집한 나무들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불이 결국 숲 전체를 홀랑 다 태울 수 있다. 즉, 작은 불은 끄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이 숲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더 나은 방법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쌀사태 실험이 흥미로운 다른 이유도 있다. 쌀 한 톨을 떨어뜨린 다음에 쌀산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방금 떨어뜨린 쌀 한 톨 때문에 아래로 움직여 밀려 내려간 쌀알이 몇 톨이었는지 세어 쌀사태의 규모를 측정해보자. 대부분의 쌀사태는 규모가 아주 작아서 떨어뜨린 한 톨의 쌀알은 봉우리 근처 쌀알 몇 개 정도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는 엄청나게 큰 규모의 쌀사태가 일어나기도 한다. 떨어뜨린 쌀 한 톨이 몇 톨의 쌀알을 아래로 밀면, 이처럼 밀려간 쌀알이 또 더 아래의 쌀알을 밀어버린다. 결국 방금 떨어뜨린 쌀 한 톨로부터, 커다란 쌀산 전체의 지형이 변하는 크나큰 격변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쌀사태 실험과 비슷한 우리 주변의 실제 자연현상도 있다.

규모가 작은 것은 정말 자주 있지만, 간혹 아주 드물게는 엄청난 규모로 일어나는 어떤 현상. 바로 지진 얘기다. 지진 규모나 위의 애들 장난 같은 사고실험의 쌀사태 규모나, 정확히 같은 멱함수 꼴의 확률분포를 가진다(규모가 x인 지진 혹은 쌀사태가 일어난 횟수를 N이라 적으면, 둘 모두 N이 개략적으로 1/x에 비례한다). 이처럼 멱함수 꼴의 확률분포를 가지는 사건들의 공통점은, 지금까지 가장 큰 규모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그 기록이 신기록으로 남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거다. 지진 규모의 확률분포로부터 아래의 예측도 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인류가 겪었던 가장 커다란 지진의 규모보다 열 배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일어날 확률은 과거 지진 규모 신기록 확률의 1/10이다. 인류역사가 앞으로 열 배 더 지속된다면 지금까지 가장 규모가 컸던 지진보다도 열 배가 더 큰 규모의 지진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장난 같은 쌀사태 사고실험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도 있다. 엄청난 규모로 일어난 쌀사태를 촉발한, 산꼭대기에 방금 떨어뜨렸던 쌀 한 톨을 다시 손가락으로 집어내 이리저리 아무리 살펴봐도 딱히 다른 쌀 한 톨에 비해 크기나 모양이나 다를 것이 하나 없다. 또 봉우리 부근에서 다른 쌀 몇 톨이 약간만 더 잘 버텨 주었다면 쌀사태는 아래로 파급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즉, 대규모의 쌀사태, 그리고 엄청난 지진을 일으킨 원인으로, 처음 이 격변을 촉발한 국소적인 사건을 지목하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다. 이보다는, 이전에 오랜 시간 계속 누적돼 널리 퍼져 서로 연결된, 일련의 긴장 관계들의 사슬을 지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격변의 원인은, 격변을 처음 촉발한 방아쇠 역할을 한 개별 요소의 특수함이 아니라 현재의 전체적인 긴장 상황을 만든 과거 일련의 역사적인 과정이라는 뜻이다. 비슷한 논의를 인류의 역사에 비유해 전개하기도 한다.

1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세르비아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 사건을 지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 사건이 1차 대전을 촉발한 방아쇠일 수는 있지만, 당장이라도 불붙을 수 있는 화약고처럼 유럽 여러 나라들 사이에 형성돼 누적된 국제적인 긴장 상황이야말로 1차 대전의 진정한 원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그럴 듯하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의 발견도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의 등장 이전에 이미 발전을 거듭해온 고전역학과 전자기학, 그리고 기존 물리학 내부에서 발견된 고전물리학의 모순과 긴장이 상대성 이론을 결국 만든 것이다. 아무리 아인슈타인이라도 만약 기원전에 태어났다면, 특수상대론은 고사하고 뉴턴의 고전역학도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앞에서 살펴본 간단한 쌀사태 사고실험은 생명의 기나긴 진화의 역사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이런 진화의 과정에서 어떤 때는 외부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규모의 멸종이 일어나기도 했다. 앞에서 쌀사태 실험을 할 때, 쌀산이 올라가 있는 종이를 옆으로 휙 움직이면 당연히 쌀산은 무너져 내리는 격변이 생기게 마련이다. 과거 지구에 떨어진 커다란 운석으로 공룡의 대멸종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크고 작은 멸종은 운석과 같은 외부의 요인이 전혀 필요치 않다. 우연히 발생한,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던 한 종의 멸종은 그 종에 생태적으로 연결된 다른 종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꼭대기에 방금 떨어진 한 톨 쌀알이 다른 쌀알에도 영향을 미쳐 아래로 밀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우연한 한 종의 멸종이 다른 두어 종을 멸종시키고, 이렇게 파급돼 커진 멸종의 사슬이 이어져 엄청난 대멸종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과학자들이 찾아내지 못한 종이 지구 위에는 아직 많다고 한다.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한 종의 멸종으로 시작된 멸종의 연쇄반응으로 인류가 절멸할 수도 있다. 지구의 생태계는 이처럼 아슬아슬하게 경사각의 문턱값을 유지하고 있는 쌀산과 닮았다.

쌀산은 쌀 한 톨 한 톨의 운명에 무심하다. 아무리 큰 규모의 쌀사태가 일어나도 결국 쌀산은 또다시 경사각의 문턱값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쌀산 전체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쌀 한 톨이 있다. 주변 쌀알을 이리저리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이기도, 심지어는 무심하게 주변의 쌀알을 밖으로 던져 없애버리기도 한다. 요 고약한 쌀알 한 톨은 주변의 경사각이 급해져 불안해지자 자기 주변에 높이 1㎝의 장벽을 쌓고 그 안에서 안도하고 있다. 다음에 높이 10㎝, 100㎝의 쌀사태가 닥쳐 얼마든지 자기가 쌀산 밖으로 밀려나 사라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인류가 멸종해도 생태계는 어떤 형태로도 당연히 지속된다. 인류의 자만으로 기울어진 생태계는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다. 자연은 인류의 운명에 무심하다. (문화일보 5월 11일자 24면 13회 참조)

성균관대 교수
[ 많이 본 기사 ]
▶ ‘에이즈’ 20대女 상습 성매매…“10∼20명 성관계”
▶ “사타구니 채혈 필요”···女환자 속옷 갑자기 내린 의사 유죄..
▶ 아사히 “북한, 군·비밀경찰요원에 실탄 지급 시작”
▶ 40대 의사가 실습 여학생과 술자리 뒤 성폭행
▶ 가수 박기영, 탱고 무용수 한걸음과 결혼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 : m.munhwa.com ]
[AD]
topnew_title
topnews_photo - 특수작전용 ‘잠수정’ 탑재 포착英언론, 요원들 부산 입항 보도美해군 “일상적 항구방문일 뿐”작전 내용 안 알리는 게 관례수중침투용 S..
mark40대 의사가 실습 여학생과 술자리 뒤 성폭행
mark100전 100승…바둑 독학한 무적 ‘알파고 제로’ 나왔다
‘에이즈’ 20대女 상습 성매매…“10∼20명 성관..
‘대외관리’ 특별요청한 특수활동비… 비중은 靑..
범인 잡기보다 계급 따기… 경찰, 국감날 근무..
line
special news 가수 박기영, 탱고 무용수 한걸음과 결혼
가수 박기영(40)이 1살 연상의 탱고 무용수 한걸음(41)과 18일 화촉을 밝힌다.소속사 문라이트..

line
소득없어 국민연금 못낸다던 무직 34세 수입차..
현행법상 금지인데… 경찰 勞組 설립 논쟁 불..
아사히 “북한, 군·비밀경찰요원에 실탄 지급 시..
photo_news
체조 금메달리스트 “팀 닥터에게 성추행 당했다”
photo_news
누드사진·재벌과 계약결혼 러시아 패리스 힐턴 “大選 출마..
line
[연재소설 徐遊記]
mark(1228) 60장 회사가 나라다 - 1
illust
[인터넷 유머]
mark남자가 지킬 10가지
mark분노가 치미는 인터뷰 기사
topnew_title
number “사타구니 채혈 필요”···女환자 속옷 갑자기 ..
의붓 할아버지가 6년간… 10代 소녀 두차례..
금융기관장 인사,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이유..
박근혜 불출석… 재판부 국선변호인 선정 착..
‘옹졸 폭군’엔 아부가 특효약… ‘甲질 고객’은..
hot_photo
강남역 한복판 옷가게에 승용차..
hot_photo
‘가시나’ 선미, 파리서 겨울 패션..
hot_photo
文대통령, T-50에 올라 ‘엄지척’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사업안내 | 이용안내 | 구독안내 | 독자참여 | 회원서비스 | 고충처리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책임자:최중홍) | Site Map
제호 : 문화일보 | 주소 : 서울시 중구 새문안로 22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01697 | 등록일자 : 2011년 7월 15일 | 발행·편집인 : 이병규 | 발행연월일 : 1997년 1월 1일
Copyright ⓒ 문화일보. All Rights Reserved. ☎ 02) 3701-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