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전시의 귀재요?… 끊임없는 엉뚱한 상상이 비결이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지난 9일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전이 열린 기획전시실 앞에서 기획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이영훈국립중앙박물관장

“‘전시의 귀재’라고 불리는 비결이요…? 쑥스럽지만, 끊임없이 엉뚱한 상상을 하는 거죠.”

국립중앙박물관은 ‘말 많고 탈 많은’ 곳이다. 국보·보물 등 국가 유물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내 최고·최대의 관리 기관이다 보니 늘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냥 넘겼다간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모든 게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욕먹기 쉽다. 따라서 중앙박물관을 책임지고 있는 수장인 관장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지난 3월 김영나 전 관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영훈(60) 신임 관장도 신고식을 톡톡히 치렀다. 지난 5월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전(展) 때다. 일단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으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암초에 부딪혔다. 스님들이 전시에 들어가기에 앞서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에 대해 불교의식인 헌다(獻茶), 헌화(獻花)를 하겠다고 요청한 것에 난색을 보였다가 강한 반발을 산 것이다. 다행히 서로의 오해를 풀고 일이 무사히 마무리됐으나 박물관장으로의 역할과 책임을 새삼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1982년 중앙박물관 학예사로 박물관과 인연을 맺은 이후 34년간 ‘박물관맨’으로 살아온 이 관장을 지난 9일 중앙박물관장실에서 만났다. 취임 100일을 맞은 이 관장은 학예사와 학예실장, 지방 국립박물관장을 거쳐 중앙박물관장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전시의 귀재’로 불릴 만큼 창의적인 기획으로 정평이 나 있다.

◇12년 전 ‘상상’을 현실로 옮긴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이 관장은 중앙박물관 학예실장 시절이던 2004년 처음 한일 반가사유상전을 구상했다. 중앙박물관의 용산 청사 이전을 앞두고 유물 이동이 한창이던 때였다. 옛 중앙박물관(현 고궁박물관)의 고려 시대 철불을 미리 옮기고 나니 약 264㎡(약 80평)의 전시공간이 텅 비어버렸다. 이 관장은 이런 공간을 놀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궁리 끝에 78호, 83호 반가사유상만 한 공간에 전시하는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에 옮겼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중앙박물관 ‘경복궁 시대’의 마지막 전시를 히트시키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한일 반가사유상 동시 전시 아이디어는 그때 나왔다. 우리의 83호, 그리고 83호를 빼닮은 일본의 고류지(廣隆寺) 반가사유상의 만남을 상상했다. 그러나 2007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가면서 더 이상 진행이 어려웠다. 하지만 결코 잊은 적은 없다.”

이 관장의 구상은 2012년 다시 구체화됐다. 평소 교류하는 일본 와세다(早稻)대 교수들에게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는 반응을 듣고 자신감을 얻었다.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2015년 전시를 목표로, 고류지 측과 3년간 9차례 회의를 하며 협의했다. 하지만 고류지로부터 최종적으로 불상의 외부 반출은 불가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일 국보의 만남은 그대로 무산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 관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엔 주구지(中宮寺)에 있는 반가사유상에 ‘러브콜’을 보냈다. 결국 주구지의 허락을 얻어 한·일 양국 반가사유상의 최초 전시에 성공했다. 이 전시는 지난 3주간 폭발적인 반응 속에 진행됐고, 21일부터는 도쿄(東京)박물관에서 이어지고 있다.

“일본 반가사유상을 국내로 들여와 전시한 것은 ‘기적’이다. 주구지의 반가사유상은 대웅전의 본존불이다. 마치 불국사 대웅전의 본존불인 금동불을 떼온 것이나 다름없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를 비롯해 많은 분이 도와줬다. 국내 관람객은 물론 일본 관람객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앙박물관은 항상 열려 있어야

또 하나 예민한 문제가 있었다. 마침 중앙박물관 등 서울 소재 5개 주요 박물관·미술관에 대한 연중무휴 개편설이 나왔다. 이 관장의 생각이 궁금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박물관을 개방하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휴관일을 없애는 쪽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3개 지방박물관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시기상조다. 인력과 예산도 부족하다. 그러나 적어도 중앙박물관의 문은 계속 열려 있어야 한다. 중앙박물관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 계속 열어둬야 외국인들도 수시로 찾을 수 있고 국민들도 즐길 수 있다. 유물의 수리나 교체 시에 문제가 된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것도 발상만 전환하면 간단하다. 그냥 관람객들이 보는 앞에서 하는 것이다. 관람객들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가림막을 설치해놓고 조명을 바꾸고, 유물을 정리하면 된다. 그러나 더 큰 규모의 공사가 요구된다면 그때는 해당 전시실을 닫아놓고 하는 방법도 있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할 텐데 중앙박물관에는 6개의 대형 전시실이 있다. 이 중 하나를 닫는다고 해서 관람객들이 화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문을 닫아서 아예 볼 수 없는 게 아니라 닫힌 전시실을 제외한 나머지 5개 전시실을 여유 있게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연간 약 15억 원의 예산이 추가로 소요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현재 정규직 기준 231명인 인력도 더 늘어나야 한다.

“참고로 브리티시 박물관이나 타이완 고궁박물관은 월요일 휴관이 없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도 3∼4년 전부터 월요일 휴관을 없앤 걸로 안다. 아마 똑같은 이유일 것이다.”

◇욕심나는 전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전

부임 100일을 맞아 이 관장은 최근 2가지 프로젝트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하나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전, 다른 하나는 신안해저유물전이다.

광개토대왕릉비전은 그가 중앙박물관장으로서 꼭 추진해보고 싶은 테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통해 요즘 관심이 커지고 있는 고구려 역사를 되짚어보자는 취지다.

광개토대왕릉비는 현재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縣)현 퉁거우(通溝)에 있다. 역대 왕릉비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높이 6.39m, 너비 1.38∼2.00m로, 4면에 약 1800자가 새겨져 있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이 연대순으로 기록돼 있다.

해외에 있는 데다 거대하기에 물리적으로 실물 전시는 불가능하다. 이 관장이 생각한 건 ‘탁본’이다.

“탁본은 버전이 다양한데 이를 걸개그림 형식으로 종합전시실의 통로 좌우 벽면에 거는 걸 생각하고 있다. 이에 앞서 ‘고구려 와당(기와)’전도 준비 중에 있다. 2018년쯤 개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 달에는 신안해저유물전이 열린다. 신안선은 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중국의 ‘보물선’이다. 올해로 발굴 40주년을 맞아 기획전으로 마련됐다. 그러나 유물은 이미 다 공개된 것들이다. 이 관장이 보기엔 ‘임팩트’가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또 아이디어를 냈다. 보물선을 통째로 보여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려주자는 것. “신안 유물선 관련 보고서에는 도자기 500여 점만 소개됐다. 그러나 실은 2만4000점이 넘는다. 동전도 무려 28t이나 들어있었다. 그걸 모두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 느낌이라도 보여주고 싶다. 왜냐하면 그건 보물선이었으니까.”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이 새로운 것

그렇다면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샘솟는 아이디어의 비결은 뭘까. 바로 끊임없는 궁리(窮理)다.

이 관장은 전시는 늘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을 마음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항상 역지사지(易地思之)로 현상을 들여다본다. 한번 뒤집어보면 의외의 길이 열린다.

경주 황남대총 전시가 그랬다. 서울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이 관장은 전시에 스토리를 입혔다. 금관을 중심으로 위아래와 좌우에 유물을 배치해 입체적으로 구성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011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했던 ‘우물에 빠진 통일신라 동물들’전도 기획의 ‘승리’였다. 우물 속에서 발견된 각종 동물 뼈를 토대로 상상력을 펼쳤다. 그 동물들이 우물에 빠지게 된 사연과 상황을 그려냈다. 어른은 물론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현대미술과 전통의 조화를 테마로 한 ‘한국 100개의 자화상’도 기억에 남는 전시다. 1995년 현대미술가 95명과 5명 민속화가의 자화상을 동시에 전시했다. 박물관에서 현대미술을 전시한 ‘파격’은 그때가 거의 처음이었다.

이 관장은 요즘도 휴일이면 가끔 백화점 보석 코너에 들른다. 어떻게 디스플레이를 했는지 보기 위해서다.

“유물이 결국 보석 아닌가. 조명과 세팅 등 어떻게 전시했는지를 보고 나중에 유물 전시에 활용한다. 얼마 전엔 한 지인이 명품 핸드백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 파티에 초청해 가봤다. 이것저것 전시에 도움이 되겠다 싶은 걸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와 직원들과 공유했다.”

◇문성근·송강호를 후배로 둔 연극인

이 관장의 엉뚱함은 그의 독특한 이력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그는 대학 시절 한때 연극에 빠졌었다.

1977년 창단한 극단 연우무대의 창립 멤버 출신이다. 대학원생 신분으로 선배들과 함께 참여했다. 비록 3개 작품만 하고 4번째 작품을 하다가 군대로 ‘도피’했지만 어엿한 연극인 출신이다.

“문성근·송강호 씨가 후배다. 한때 연극에 심취해있었다. 어떤 작품은 주연까지 맡았다. 그러나 실연을 하고 연극을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군대를 도피처로 택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열정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모교인 경기고 동기들이 주도하는 ‘화동연우회’란 연극모임이 있는데 그동안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못했지만 나중에 기회가 생길 듯하다.”

◇나는 나쁜 아빠…가족에겐 늘 미안

이 관장은 ‘딸딸이’ 아빠다. 큰딸은 일반 직장에 다니고 있고 작은딸은 대학생이다. 그러나 둘 다 전시기획과는 무관한 전공을 했다.

“아이들이 한창 아빠를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1989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긴 이후 20여 년을 지방에서 근무해 거의 집을 떠나 있었다. 딸들이 아빠를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게 미안하다. 묵묵히 버텨준 아내에게도 미안하고 감사하다.”

이 관장의 부인은 문화재청 국제협력과에서 근무하고 있다. 중앙박물관에서 같은 학예사로 만나 1988년 결혼했고, 지금까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가끔 중앙박물관이 문화재청과 대립각을 세우는 기관으로 비칠 때가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게다가 아내가 문화재청에서 일하고 있으니 서로 사정을 뻔히 알고 있다.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려고 한다.”

관장 부임 후 100일을 맞은 그는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중앙박물관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절감한다고 했다. “책임이 무겁다. 흥미롭고 유익한 전시를 만들어보겠다. 원한다면 모든 수장고를 열어젖히겠다.”

인터뷰 = 김인구 차장 (문화부) clar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