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친근한 사물들의 낯선 이야기 상상해보는 게 재미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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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번째 소설집 ‘중국식 룰렛’ 펴낸 은희경

책·옷·신발·가방·사진·음악…
인간에 대한 관심 벗고 새 시도
좋아하는 술부터 이야기 시작

이 나이에 大作 쓸 욕심 없어
그저 일상에 대한 호기심일뿐
선입견 없애려고 꾸준히 노력

“등단 21년, 한결같은 비결요? 이 나이에 무슨 대작(大作)을 쓰겠다는 욕심 같은 건 없어요. 그저 날마다 벌어지는 일들에 끊임없이 호기심을 갖고, 왜 그럴까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거죠. 이번엔 그 호기심의 대상이 ‘사물’이었어요. 좋아하는 술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이었고 그게 8년간 6편으로 모였네요.”

빛나는 문장으로 독자를 보듬어온 소설가 은희경(57)이 여섯 번째 소설집 ‘중국식 룰렛’(창비)을 펴냈다. ‘중국식 룰렛’은 일종의 ‘표제소설’이다. 술, 옷, 신발, 가방, 책과 사진, 음악 등 우리가 늘 가까이하는 사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은 작가는 “친근한 사물들이 어떤 낯선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상상해 보는 게 재미있었다”면서 “그동안 인간관계나 편견에 관심을 뒀던 나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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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첫 번째 단편 ‘중국식 룰렛’은 ‘진실 게임’이다. K의 술집에 모인 4명의 남자가 저마다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며 ‘정직한’ 거짓말들을 쏟아낸다. 우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뒤엔 얽힌 운명이 도사리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재로 술, 그중에서도 위스키가 중요하게 사용됐다는 점이다. 도입부만 읽어봐도 단번에 은 작가의 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애주가라면 솔깃할 정보들이 제법 풍부하다. 평소 술을 즐긴다는 은 작가는 “새로운 시도여서 자유롭게 하고 멋도 부려봤지만 역시 가장 재미있었던 건 말하나 마나 술이었다”고 말했다.

은 작가는 ‘중국식 룰렛’을 2008년에 썼다. K의 술집 같은 곳에 여러 차례 갈 기회가 있었고, 각종 동호회를 통해 위스키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서 이를 소설로 연결했다. 은 작가는 “지난해 4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작가 축제에 다녀왔는데 개인적으로 그때 맛봤던 미들턴 위스키가 가장 좋았던 것 같다”며 웃었다.

다른 5개의 단편도 다 이런 과정을 거쳤다. 남자의 슈트에 대해 쓴 ‘장미의 왕자’는 2011년 잡지 ‘GQ 코리아’의 원고 청탁을 받아 쓴 것이다. 가방과 사진을 이야기한 ‘불연속선’은 한 미술 갤러리의 ‘가방 탐독’전에서 그래픽 디자인과 협업 형식으로 전시됐다. ‘대용품’은 신발, ‘별의 동굴’은 책, ‘정화된 밤’은 음악 등 인연이 인연을 낳으면서 완성됐다.

하지만 모든 게 처음 생각대로 간 건 아니다. 늘 변수가 있었다. 은 작가는 ‘중국식 룰렛’을 쓰다가는 ‘토지’ 박경리 작가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짧은 순간이지만 초연함을 경험했다. ‘별의 동굴’을 쓰던 도중에는 갑작스러운 심장 부정맥으로 실제로 병원 신세를 졌다. 책에만 의지하던 사람의 몰락을 그려보려 했으나 이런 예상하지 못한 돌발상황으로 인해 방향이 수정됐다. 자신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이번 소설을 쓰는 데 일종의 자극제가 됐다.

은 작가는 “지금까지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건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선입견을 없애는 게 그동안 꾸준히 작품을 낼 수 있었던 원동력 같다”고 강조했다.

은 작가는 지난해 개인적으로 큰 경사가 있었다. 첫 손자를 얻었다. 은 작가는 “지난해 12월 큰아들네가 아들을 낳았다. 내겐 아주 행복한 사건이었다”면서 “할머니가 됐다는 게 글을 쓰는 작가로서 편견으로 비칠까 봐 두렵지만 주변 친한 지인들에게는 늘 손자 자랑을 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은 작가는 곧이어 장편소설 집필 작업에 들어갈 계획이다. 1970년대 말 여자대학 기숙사가 소재다. 30여 년 전이 배경이지만 그때의 인연이 현재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 은 작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또 뒤돌아보지 않을 테지만 내가 띄워 보내는 이야기의 배가 기왕이면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가주었으면 싶다”고 덧붙였다.

은 작가는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이중주’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등이 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