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갯바위 석양장면 찍을 땐 절로 눈물… 연기인생서 ‘가장 정든 촬영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촬영지인 경북 영덕군 강구항. 최불암은 이곳을 “내 연기 인생에서 가장 정이 든 곳”으로 꼽는다. 그는 요즘도 가끔 강구항에 들러 등대 앞에서 막내 아들 민규(송승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던 장면을 떠올린다고 했다. 영덕군청 제공

43 최불암이 추억하는 ‘그대 그리고 나’ 배경 경북 영덕

1967년에 배우로 데뷔한 나는 50대 후반에 들어서서야 첫 멜로 연기를 하게 됐다. 바로 1997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방송됐던 MBC 주말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다. 이 드라마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하다가 결혼해 살아가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며 내가 맡은 역할의 로맨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장안의 화제가 됐다. 드라마에서 내가 연기한 박재천은 왕년에 마도로스로 잘 나가다가 나이가 들어서 바다낚시 온 손님들을 안내하며 먹고사는 인물이다. 별명이 ‘박 뻥’으로, 60이 돼서도 철이 나지 않은 천하의 한량 홀아비다.

재천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장남인 동규(박상원)만 서울에서 번듯한 회사에 다니고, 둘째 영규(차인표)와 딸 상옥(서유정), 막내 민규(송승헌) 등 나머지 자식들은 아버지 그늘에서 별 희망 없이 살고 있었다. 동규가 직장 후배인 수경(고 최진실)과 사랑에 빠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결혼한 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사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며 당시 6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재천의 ‘삼각관계’가 더 큰 관심을 끌었다. 재천과 수경 어머니의 친척 동생 홍 여사(박원숙), 민규의 생모 계순(이경진) 등 세 사람이 얽힌 애정 관계의 에피소드는 글 뒷부분에 자세히 소개하겠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경북 영덕이다. 재천 가족들의 삶의 터전이 그곳이었다. 촬영은 영덕군 강구항과 울진군 후포항에서 나눠 찍었다. 재천과 자식들이 사는 집은 후포항 인근에 있었고, 낚싯배를 묶어 놓은 곳은 강구항이었다. 실제로는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드라마에서는 집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항구가 나오는 설정이었다.

내 연기 인생에서 가장 정이 든 촬영지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영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오래 한 드라마는 ‘전원일기’지만 20년 넘게 방송되는 동안 촬영지가 여러 번 바뀌었고, 당일 촬영 후 머물지 않아서 이렇다 할 추억이 없다.

영덕에 촬영을 가면 하루를 자고 왔다. 1년여 동안 강구항 근처 주택에서 배우들이 함께 지냈다. 촬영이 끝나면 후배들과 어울려 식당에서 싱싱한 횟감과 영덕게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지금은 술을 절제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때만 해도 꽤 마셨다. 특히 양택조(재천의 친구 역)와 술을 마시며 속을 터놓고 얘기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배우들의 숙소로 쓰던 집에 할머니가 한 분 사셨는데 소라를 삶아서 까주시고,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또 동네 사람들도 뭐만 있으면 가져다주며 정스럽게 응원을 해줬다.

바닷가 마을은 생동감이 넘친다. 갈매기 울음소리와 철썩대는 파도소리, 어선에서 뿜어내는 뱃고동 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활기차게 들려왔고, 그런 활력이 드라마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현장의 생동감은 대단하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모은 ‘태양의 후예’도 모래와 군복에서 느껴지는 현장의 생동감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덕의 석양은 참 슬프다. 붉은 노을이 질 때쯤 갯바위에 걸터앉아 파도소리를 듣고 있으면 벌겋게 물든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딸년’이 모델 일을 하겠다며 서울로 도망간 후 재천이 홀로 바닷가에 앉아 있는 장면을 찍을 때는 별 감정을 잡지 않고도 ‘철썩’ 하는 파도소리만 들으며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연기를 하는 내가 그랬으니 거기 사시는 분들이야 오죽하랴. 항구에는 희극과 비극이 얽혀 있다. 남자는 떠나가고 여자는 하염없이 기다린다. 남자는 만선으로 돌아와 술집에서 화투를 치며 돈을 다 까먹고 다시 떠난다. 그래도 여자는 그 자리에서 또 기다려준다. 심수봉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고….

14대 국회에서 비례대표 의원을 지낸 나는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지역구 후보로 나갔다가 고배를 마셨다. 그즈음 김정수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국회는 다 잊으신 거죠?”(김정수), “여부가 있겠어요. 내 길을 가야죠”(나), “이번에는 상당히 힘 있는 남자 역할이에요. 뱃사람이고요”(김정수), “해봅시다”(나). 드라마 출연을 수락한 후 매니저와 함께 바로 충남 대천해수욕장으로 갔다. 바다 마을 분위기와 뱃사람의 정서를 직접 느끼기 위해서였다. 내친김에 전남 목포를 거쳐 부산까지 갔고, 영덕에도 들른 후 울진으로 해서 올라왔다. 뱃사람들은 대체로 말수가 적고 무뚝뚝했다. “왜 왔능교”라고 물은 후 묵묵부답이다. 새벽 3∼4시쯤 일어나 자식들이 자는 방문을 힐끗 열어보고는 별말 없이 집을 나선다. 부인은 “잘 다녀오이소∼”라고 외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 남편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 부인은 방으로 들어가 라디오를 켠다. 바다 날씨를 체크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처음 받은 1, 2부 대본에는 재천의 대사가 많았지만 바다 마을을 둘러보고 온 후 김 작가와 상의해서 대사를 줄였다. 그렇게 한두 마디 한 후 쓱 돌아서는 재천 캐릭터가 만들어졌다.

재천은 내가 해온 배역 중 가장 젊은 역할이기도 하다. 데뷔 이후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등 내 나이보다 많은 역할을 맡아오다가 50대 중반에 드디어 내 나이와 비슷한 60대 전후의 역할을 하게 됐다. 그래서 분장을 거의 안 하고 내 모습 그대로 나갔더니 신문에 ‘최불암 변신하다’라고 대문짝만 하게 났다. 오랜만에 노역의 가면을 벗고 편안하게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이렇듯 여러 면에서 이 드라마는 내 배우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이고, 또 나를 살려낸 히트작이기도 하다.

이제 재천의 사랑 이야기를 해보자. 홍 여사가 재천의 남자다운 면에 매력을 느끼며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홍 여사 주변에는 돈만 밝히는 좀스러운 사내들이 많았는데 재천은 그런 사내들과는 달리 호방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미모에 아랑곳하지 않는 재천의 무심함에 속이 타고 자존심이 상한 터라 더 적극적으로 재천에게 다가왔다. 홍 여사와 데이트 장면에서는 항상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다운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얇은 바바리코트만 입고 멋을 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장면을 찍으며 감기가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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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순과는 하룻밤 풋사랑으로 민규를 낳게 됐다는 설정이었다. 아내가 죽은 후 임시로 밥해주러 온 계순에게 재천이 흑심을 품었고, 계순이 민규를 낳아서 재천에게 보낸 거다. 민규가 자신의 생모를 찾은 후 방황을 해 재천이 계순을 만나러 서울로 갔다. 어렵사리 계순을 찾아내 “같이 살자”고 했는데 계순이 “싫다”고 해서 “그러면 이승에서 못다한 정을 저승에서 나누자”고 말하며 나오다가 실제로 감정이 고조돼 쓰러질 뻔했다. 그만큼 연기에 몰입했고,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지인과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는데 옆에 있던 중년 여성이 “누구하고 결혼하실 거예요?”라고 묻길래 “작가만 안다”고 답해줬다. 그 옆자리에 있던 젊은이들이 “박원숙 씨와 하세요”라고 말하자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화를 내며 “자식을 낳아준 여자를 두고 어떻게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요”라고 소리쳐서 싸움이 났다. 그걸 말리느라 곤욕을 치렀을 정도로 재천이 누구와 결혼할지가 큰 관심사였다.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드라마 국장에게 농담 삼아 전했더니 바로 설문조사를 해야겠다고 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70% 이상이 박원숙을 지지했다. 또 노인들이 참여한 ARS 조사에서는 이경진과 하라는 응답이 70% 이상이었다. 결국 드라마 국장이 이경진과 결혼하는 걸로 결정해 발표했고, 박원숙은 “평상 시에도 남자 복이 없는데 드라마에서까지 복이 없다”며 삐쳐서 나와 말도 안 했다.

재천이 계순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 공중에 헬기까지 떠서 촬영을 했다. 이경진이 울길래 내가 겉옷을 벗어서 덮어주며 “헬기에서는 눈물 흘리는 거 잡히지 않으니 울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행복했던 촬영을 끝내며 헤어지는 아쉬움에 진짜 눈물을 흘린 거다. 그게 바로 한국인의 정서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여러 차례 영덕에 갔고, ‘한국인의 밥상’을 촬영하기 위해 근처를 지날 때면 일부러 그곳에 들른다. 내 아버지 고향은 황해도 해주고, 내가 태어난 곳은 인천이지만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다. 그래서 고향의 개념이 없다. 하지만 영덕에 가면 고향에 온 느낌이 든다. 갈 때마다 꼭 등대를 찾는다. 민규에게 처음으로 “엄마 그립지. 아빠가 미안하다”라고 따뜻한 말을 건넨 곳이다.

등대는 속에 담고 있던 말을 내뱉게 한다.

배를 안내하는 등대가 그렇게 인생도 안내해 주는 것이다.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