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정식 목천문화재단 이사장이 27일 서울 종로구 사직로에 위치한 재단 건물 내 건축아카이브에서 설계도면을 보고 있다. 그는 지난 2007년 정림건축 명예회장에서 물러난 뒤 “앞으로는 건축을 위해 좋은 일, 선한 일을 하겠다”면서 목천문화재단을 통한 나눔과 기부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김정식 목천문화재단 이사장
인천국제공항과 서울월드컵경기장, 국립중앙박물관, 청와대, 김대중컨벤션센터. 기능과 쓰임새가 서로 다른 이 건축물들은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구조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하나 공통점을 찾는다면 모두 한국 건축가 1세대를 대표하는 원로건축가 김정식(81) 목천문화재단 이사장의 손길을 거쳐 간 작품이라는 점이다. 1950년대 전후복구기를 거쳐 1970∼198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기는 그대로 건축가 김정식의 성장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1967년 정림건축을 설립해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설계회사로 키웠고, 2007년 정림건축 명예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목천문화재단을 설립해 건축을 통한 나눔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27일 서울 시내에 위치한 목천문화재단 사무실에서 그가 평생 헌신해온 건축에 대해, 그리고 나눔과 기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최근 자율형 사립고 대광고에 드론 등 과학 기자재 구입을 위해 3억 원을 기부하셨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대학이나 자선단체에 대한 기부는 많아도 중·고교 등에 대한 기부활동은 흔치 않은데, 남다른 배경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대광고는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작고)이 훌륭한 장로님들과 힘을 합쳐 지은 학교입니다.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이 정말 많았지요. 그때가 6·25전쟁 후였는데 선생님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가르치셨어요. 그 학교에서 ‘시그마(∑)’란 것도 태어나 처음 배웠어요. ‘이게 뭔가’ 싶어 가르쳐 주신 선생님을 시그마 선생님이라고 불렀죠. 선생님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 저희 정원이 120명 정도였는데 그중에 100여 명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 들어갔습니다. 저희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가르쳐 줬던 모교 선생님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기부활동을 하신 거군요.
“그렇지요. 후배들이 맘껏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그전부터 이것저것 도와줬습니다.”
그는 일찍이 대광고의 ‘수호천사’를 자임해 과학기술 분야 지원활동을 해왔다. 2011년 대광고가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됐을 때 5억 원을 기부한 데 이어 과학관 현대화 사업에 5억 원 등 총 17억 원 상당의 재원을 기부했다.
―기부가 인공지능 로봇, 드론 연구 등 과학 분야에 집중된 것이 특징적입니다.
“저는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기보다 어떻게든 고기 낚는 법을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고기를 낚아 먹어야지, 빵 한두 개 받아먹고 나면 또 손을 벌리게 되는 그런 기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기부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공대를 나와서 그런지 아이들이 수학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 수학 우수생에게 장려금을 기부한 적이 있어요. 그 후에 학교에 찾아갔는데 과학관의 기자재가 낡았다는 얘기를 듣고 5억 원을 내놨습니다. 새로운 기자재로 실험을 하니 학생들이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학생들이 취미를 갖고 과학 분야에 심취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교육은 기술 개발 쪽에 힘써야 합니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 하나 덕분에 국가 경제가 좌지우지되고 있는데 우리 경제가 더 성장하려면 계속 새로운 게 나와야 합니다.”
―아프리카 르완다에 청소년평화센터를 설립하고 계신데, 멀고 먼 아프리카의 르완다를 돕기로 한 배경이 있는지요.
“처음엔 우리나라에 가난한 학교를 도와줄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굉장히 안정돼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물론 도우려면 한없이 도울 수 있지만, 밥도 못 먹고 칠판도 없는 학교가 다른 나라에 얼마나 많은데 이걸 도울 방법이 없나 하는 생각을 하다 100주년기념교회의 이재철 목사로부터 르완다 얘기를 듣고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르완다에 간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는데, 그때 르완다 부족 간 학살에 대해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의논한 끝에 학교보다는 청소년평화센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런 결정을 한 것입니다. 처음에 3억 원 정도로 시작했습니다.”
―르완다에 직접 가 보셨는지요.
“네, 직접 가봤습니다. 건축을 하려면 지형도 알아야 하고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게 뭔지, 기후가 어떤지 등을 다 알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처음에 르완다 청소년평화센터 지원계획을 밝힌 뒤 르완다 측에서 설계도를 받아 봤는데 이게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어요. 르완다에서는 1994년 내전으로 투치족과 후투족이 싸워 인구의 10%가량인 100만여 명이 희생됐습니다. 그래서 화합을 위한 설계가 필요한데, 그 설계도에는 조그만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햇빛도 통풍도 안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결국 직접 설계를 했어요. 우선 주민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화합의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운동장을 크게 설계했어요. 다목적홀을 설계해 그 안에서 사람들이 실내 체육도 하고 모여서 춤추고 노래도 하고, 영화도 보고 회의도 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그래야 화합이 되지 조그만 방들을 만들어선 안 돼요. 넓은 운동장에서는 주말에 동네 장사꾼들이 모여서 장사도 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그래야만 사람들이 섞이지 않겠어요?”
그의 르완다 프로젝트는 시작한 지 4∼5년이 됐는데 종합시설만 완공된 상태이고 직업교육 등을 할 수 있는 곳과 도서관 건물, 관리동 등은 여전히 공사 중이다.
―르완다를 직접 방문한 소감은 어떠셨는지요.
“3년 전에 갔다 왔는데 새마을운동을 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더군요. 새마을운동 복장을 하고 있었어요. 새마을운동 모자도 쓰고요. 거기는 도로가 아스팔트가 아니어서 주기적으로 보수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길을 닦으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4∼5년 전 미얀마에 갔을 때도 군인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에 경례하는 걸 봤습니다. 그만큼 박 전 대통령이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으킨 사람으로 존경받는 것 같아 기분이 훈훈했습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정식 목천문화재단 이사장이 27일 서울 종로구 사직로에 위치한 재단 사무실에서 아프리카 르완다 등 지원사업에 대한 얘기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그의 사무실에는 르완다를 비롯해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각지에서 모은 토산품이 빼곡했다. 한 나라를 돕기 위해선 먼저 그 나라의 문화와 풍토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그의 나눔과 기부에 대한 기본철학이 사무실 곳곳에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평양과학기술대를 무료 설계한 분으로도 유명한데 고향 땅에 학교를 지으면서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평양과학기술대 설계는 김진경 총장이 당시 제가 몸담고 있던 정림건축으로 찾아와 직접 부탁한 일입니다. 제 고향인 평양에 건축을 한다는데 마다할 수 없어 기꺼이 하겠다고 했어요. 당시 김 총장은 1㎢에 학교 전체 캠퍼스를 지어 달라고 했는데, 놀라운 것은 그 계획이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 승인까지 받은 거였어요. 컴퓨터를 가르치는 과학기술대라고 하니 북한 정부가 전권을 위임한 거죠. 물론 실제로는 위임하지도 않고 멋대로 하는 경우가 많아 애를 먹었어요.”
―평양과기대 설계에서 완공까지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
“처음에 북측에서 과기대 부지로 제시한 곳은 평양에서 8∼12㎞ 떨어진 논밭이었어요. 한데 김 총장이 싫다고 해서 그다음은 무허가 집들이 많은 냇가가 부지 후보가 됐어요. 그런데 김 총장이 북한에서 그 무허가 집들을 철거하고 하자니까 그것도 싫대요. 그러다 김 총장이 고른 지역이 평양을 사수하는 수도방위사령부 자리였어요. 그곳을 딱 찍으니 담당자들이 기겁을 하더라고요. 적이 공격하면 대포를 쏘겠다고 만들어 놓은 곳인데 군인들을 옮겨 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는 거예요. 김 총장은 ‘그럼 못하겠다’고 버텼어요. 그랬더니 북측에서 김정일과 의논하고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3일이 지나자 결국 하라고 했다고 하면서 대포 부대를 이전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죠. 과기대 부지는 고속도로가 있는 곳인데 한쪽으로 가면 남포, 또 다른 쪽으로 가면 원산이에요. 입지가 굉장히 좋은 데예요. 김정일이 그곳을 허락한 건 획기적인 일이었죠.”
―꼭 과기대 부지를 그 자리에 고집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평양 시내에서 우선 가깝습니다. 대학은 도로가 굉장히 중요해요. 학생들이 왔다 갔다 하기 좋아야 하기 때문에 진입조건이 좋아야 하는 거죠. 거기는 또 대동강 하고도 가깝고요. 그러니 김정일이 얼마나 목말랐으면 그 자리를 내놨을까 싶어요. 그런 결단력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내가 평양에 간 게 2002년도였던 거 같은데 당시 과기대 건축조감도를 10부 가져갔어요. 그런데 이것을 담당자가 김정일한테 보여주니 ‘남쪽에서는 며칠 만에 이 정도로 해오는데 너희는 왜 이런 걸 못 만드느냐’고 책망을 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북측에서 10부 더 달라고 해서 나중에 따로 더 갖다 줄 정도였어요.”
―그렇게 해서 세워진 과기대인데 요즘 그 졸업생들이 북한의 해킹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북한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선의가 비수가 돼 돌아오는 게 아닌가 합니다.
“사실입니다. 아이러니하죠. 정부에서는 과기대 건립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염려가 있었는데 김 총장이 강행했죠. 처음 김 총장과 북한에 갔을 때 여러 시설을 돌아봤어요. 김책공대랑 몇 군데를 돌았는데 컴퓨터가 비치돼 있긴 했지만 형식적으로 우리 보라고 갖다 놓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북한사람들이 손재주가 있고 머리가 좋으니 컴퓨터를 금방 배우고 따라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북한은 김 총장에게 학생들 선발과 교육을 위임하겠다고 도장까지 찍었지만, 북한 측은 출신 성분과 사상 등을 모두 따져 자기네가 필요한 사람만 학교에 집어넣었어요. 김 총장은 꼼짝할 수 없었지요. 결과적으로는 정부의 판단이 맞았고, 김 총장은 좋은 일을 하긴 했지만 일부 마이너스 효과도 있었던 거죠.”
―평양과기대 설계 및 공사 작업은 순조로우셨는지요.
“내가 거기서 건설 관계 교수 2명, 차관 1명과 만나 대화했는데, 우선 건축을 하려면 자재가 중요해서 이에 대해 물어봤어요. 우선 그쪽에서 나한테 시멘트 조달에는 문제가 없대요. 그런데 덧붙이는 게 석회석을 돌려야 하는데 석유가 없어서 안 된다는 거예요. 석유를 대줘야 하느냐고 되물었더니 우물거려요. 이번엔 철근에 대해 물어봤더니 광산도 있고 문제없대요. 그래서 ‘아 문제없구나’ 했는데 또 철근을 만들려면 석유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매사가 그런 식이었어요.”
―그래도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인데 마음이 아프셨겠네요.
“마음이야 뭐… 이제 포기했어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북한 김일성 일가가 나와 동성동본이에요. 그래서 함부로 비판하지도 못하네요. (웃음)”
―이사장께서는 지난 반세기 한국의 수많은 대형 건축물을 만들어와 ‘한국을 세운 건축가’라는 평도 듣고 있는데, 여러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니 잘했다고 판단하는 부분은 어떤 게 있을까요.
“요즘 젊은 건축가들을 보면 확실히 나보다 잘한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난 젊을 때 외국도 못 나갔어요. 1970년대에 비자도 여권도 없어서 나는 외국 문물을 볼 기회가 없는 ‘국산’ 건축가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외부에 나가지도 않고 이 정도 한 건 잘한 거구나 생각해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위 사진부터 청와대·인천국제공항·무학교회·국립중앙박물관.
“청와대는 노태우 정권 때 설계했는데 당시 노 대통령뿐만 아니라 참모들도 ‘제왕적인 궁’을 생각했어요. 건축은 건축가 맘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건축주, 더군다나 대통령 앞에서 누가 자유롭게 뭐라 합니까. 미국 백악관에는 대통령 집무실이 2층에 있고, 지하에 있는 비서진이 왔다 갔다 하면서 대통령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돼 있어요. 만일 청와대를 그렇게 비서진이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만들려면 복잡해질 겁니다. 따로 옆에 건물을 지어야 할 거예요.”
―청와대를 설계할 때 가장 중시한 부분은 무엇이었는지요.
“청와대를 지을 때 첫째 조건은 공격에 대한 대비였습니다. ‘튼튼하게’ 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목조를 자재로 택하지 않았어요. 원래 기와집은 목조로 하는 게 원칙인데도 ‘불에 탄다, 폭격에 약하다’ 해서 콘크리트를 썼어요. 요즘은 콘크리트 6∼7m도 다 무기가 뚫는 판이지만, 그래도 당시엔 튼튼하게 하느라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 작품 가운데 특히 서울 성동구 소재 무학교회를 아끼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솔직히 이 자리에서 얘기하자면 나는 500여 명이 되는 식구를 데리고 정림에서 건축을 했어요. 수주를 하고 건축주를 만나고 설계안을 보는 모든 일을 내가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가 1년에 여러 개 생기면 꼼짝 못했습니다. 그래서 설계에 직접 매달리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담당자가 따로 있었고요. 내가 이렇게 저렇게 지도는 해주지만 실제로 내 손으로 설계를 계산해 본 건 그리 많지 않아요. 그런데 무학교회만은 내가 직접 설계해 시공까지 했어요. 이건 정말 내 마음대로 했어요. 인테리어도 그렇고요. 내 평생 그런 작품은 무학교회 하나였어요.”
―무학교회의 외관은 작은 인천공항 느낌이 드는데요.
“맞습니다. 인천공항 설계 이후 구조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 무학교회를 그렇게 설계했어요. 예전엔 시공하기 어려우면 안 된다고 생각해 무조건 직선으로만 설계했어요. 그런데 인천공항에서 100m가량을 곡선 형태로 설계하고 시공하면서 ‘생각한 대로 되는구나’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화여대의 건축 설계도 40년 가까이 맡으셨는데, 혹시 특수한 관계가 있으신지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닌데 1980년 이화여대 종합과학관을 설계한 이후 중앙도서관, 법정관, 부속유치원, 국제교육센터 등 대부분 건물을 설계했어요. 그래서 ‘내 대학이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6·25전쟁 전 북한 체험이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해방 후 평양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중학교에 진학하니, 자아비판 사상교육을 하더군요. 아버지를 고발하는 학생을 보고 ‘아,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먼저 서울로 갔는데 가족들이 의논 끝에 안내자를 사서 내려왔어요. 당시엔 그랬습니다.”
―정부 수립 전인데도 남북 자유왕래가 어려웠던 거군요.
“내가 서울로 온 것은 13세 때인데 가족이 다 함께 오면 잡힐 가능성이 있어 9세 동생과 먼저 내려왔습니다. 소련군 인민군의 눈을 피해 논두렁길에서 미끄러지면서 걷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남쪽으로 내려오다 잡히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곤 했어요. 그러고 나서 한 달 후 어머니가 막내를 업고 형과 6세 동생과 함께 넘어왔습니다.”
그는 가족과 서울에 정착한 뒤 명동거리에서 신문팔이 생활을 하다가 대광중학교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다니던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가 설립한 학교라서 들어갔다고 한다.
―신문팔이 생활을 얼마나 하셨나요.
“1년 정도 했죠. 명동거리에서 매일 아침 ‘문화일보요’하는 식으로 외치며 팔았는데 학생들을 보면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학생들이 부러웠어요. 공부하고 싶다는 게 당시 유일한 희망이었지요. 1948년 대광중학교에 들어갔다가 전쟁이 나는 바람에 부산으로 한 달 닷새 걸려 걸어서 내려갔어요. 당시 이북에서 피란 왔다고 위험분자로 분류될 것을 의식해 형, 아버님, 매부, 사돈들 다 같이 내려갔어요. 고생은 다 말할 수도 없고요.”
―정림건축 설립 후 형님이 디자인을 하시고, 이사장은 설계를 하셨다고 했는데 형제가 40년간 건축의 길을 함께 걸어온 것이네요.
“원래 나는 서울공대 전기과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안 맞더라고요. 형이 건축과에 들어갔는데 당시 부산 판자촌에서 형이 합판을 쪼개 와 제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모습이 그럴듯했어요. 그래서 망설이다 결국 건축공학과로 전과했어요. 형과 내가 2세 반 차이밖에 나지 않아요. 형 하고 장난을 많이 하며 함께 컸고 평생 일도 함께했지요.”
―대학 때 건축을 시작한 뒤 60년간 건축의 길을 걸을 셈인데, 후회나 아쉬움은 없으신지요.
“건축은 좀 복잡합니다. 모양만 좋아서 되는 게 아니라 튼튼하고 안전해야 하고, 또 공간이 아름다워야 하니 신경 쓸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나는 소박하고 실용적인 건물을 좋아해 소재도 화려하고 비싼것은 쓰지않습니다. 그런데 섭섭한 건 한국에서 이런 건축 설계에 대한 인식이 너무 빈약해요. 단적으로 얘기하면 한번은 제가 설계한 건물의 준공식에 갔더니 시공사 회장은 단상에 올라가고 저는 조그만 의자에 앉게 하는 거예요. 테이프 커팅도 같이 안 해요. 건축가들에 대한 인식이 빈약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또 1995년도까진 설계비가 괜찮았는데 외환위기 이후 정부에서 ‘건축가의 횡포다’ 해서 이걸 다 경쟁을 시켰어요. 그랬더니 가격경쟁이 벌어져 덤핑이 많아졌어요. 설계를 잘하고 비용이 비싼 사람들은 다 떨어지는 거죠. 지금도 그런 게 참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또 하나 아쉬운 것은 건축이 지금은 미술의 한 분야에 속해 있어요. 미술에서도 작은 분야로 취급받다 보니 항상 조각, 그림 이런 게 위주예요. 우리나라에는 건축박물관도 없어요. 다른 나라는 정부 차원에서 건축박물관을 추진합니다.”
―한국의 경제 규모로 보면 건축박물관이 있을 법한데, 아직 공론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건축박물관을 갖고 있어요. 유럽에도 있고, 폴란드 이런 나라까지 있어요. 건축박물관을 지으려면 우선 대지가 확보돼야 하고 가능한 한 도시에 있어야 해요.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어야지 시골에 있으면 누가 찾아오나요. 땅값만 해도 어마어마할 거고, 또 운영해야 하니 작은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다 보니 아무도 이를 할 생각을 안 합니다.”
―건축가들이 문제 제기를 먼저해야 사회적 호응이 있지 않을까요.
“건축단체가 건축사협회, 건축학회, 건축가협회 이렇게 크게 3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단합이 안 돼요. 한목소리를 내지 않아서 주저앉은 상태고.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도 어디 가서 국토교통부 장관도 못 만납니다. 부장이나 국장도 만나기 힘들어요. 미국 건축가협회(AIA)는 회장을 선출하면 대통령이 회장을 찾아올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찾아오기는커녕 만나기도 힘듭니다. 건축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겁니다.”
―최근에 건축가들이 쓴 책을 보면 우리나라에 불합리한 건축 규제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있던데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건축 규제가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규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지역계획, 지구계획이라면서 ‘몇 층 이상 안 된다’ ‘주차장은 몇 대 일로 하라’ 하는 식이죠. 물론 법규는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관공서의 간섭이 지나치다고 할까요, 건축가의 재량권이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없어요. 이번에 김태수라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의 구술집을 만들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제가 느낀 건 미국하고 우리는 스케일이 다르다는 거였어요. 우선 우리는 대지가 작아 ‘어떻게 하면 최대로 짓느냐’만 따져요. 그런데 미국은 땅이 매우 넓어요. 그러니 마음대로 되는 거예요. 가령 길을 가다 보면 건물 지붕이 사선으로 된 경우가 있죠? 그런 게 우리는 다 규제 때문이에요.”
―건축가로서 평생 살아오셨는데 건축가는 어떤 직업과 닮아 있는 것 같은지요.
“어떤 사람들은 건축가를 오케스트라 지휘자라 그래요. 지휘자는 색소폰 연주자도 이끌고, 북 치는 사람도 이끌고, 바이올리니스트도 이끌고 할 일이 많잖아요. 그때그때 음색을 맞춰서 조화시키는 것, 그게 지휘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건축가도 평지냐 언덕이냐, 땅이 단단하냐, 혹은 비가 많이 오냐, 바람이 어느 쪽에서 많이 부느냐 이런 여러 가지를 따져야 해요. 건축에 맞는 재료, 구조, 거기 사는 사람의 성격과 품격, 이런 걸 다 맞춰 줘야 사람들이 만족해요. 건축이 한 가지로 되는 게 아니고 여러 가지를 다 맞추는 겁니다. 여러 가지를 잘 조화시켜 나가는 것, 그게 지휘자의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건축가는 지휘자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요즘 주력하고 있는 일은 뭔가요.
“이제는 슬슬 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웃음)나는 계획을 치밀하게 하는 스타일입니다. 죽는 것도 계획해 죽어야지 그냥 죽으면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무의미하게 죽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무엇이 의미 있는 거냐. 그게 요즘 한창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보람 있는 일을 많이 하다가 가면 좋지 않겠나 싶어요. 보람 있는 일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봉사, 선한 일이 그런 것들이에요. 그렇게 살고 싶고, 또 그러기 위해 절약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지금도 휴지를 한 번 쓰고 버리지 않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어요. 종이 한 장도 이면지로 쓰고 물을 마실 때도 아끼고요. 오늘은 인터뷰한다고 신경 썼는데 평소엔 남대문시장 옷을 입고 다녀요. 몸만 가리면 됐죠.”
인터뷰 = 이미숙 국제부장 musel@munhwa.com
정리 = 손고운 기자 songon1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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