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애국’이 사라진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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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식 논설주간

프랑스 마르세유는 한국인도 많이 찾는 세계적 관광지다. 한편으로는 프랑스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가 1792년 프랑스 혁명 정부 지원에 나선 마르세유 의용군들이 불렀던 군가임이 말해주듯 호국·안보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1940년 여름에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침략에 맞서 마르세유에 주둔하던 영국 폭격기 부대가 출격하려 하자 마르세유 지방 정부는 이륙을 불허했고, 주민들은 활주로에 장애물을 설치하며 저지했다. 보복 공습이 예상된다는 이유였다. 사흘 뒤 파리는 함락됐고, 다시 사흘 뒤 프랑스는 항복했다.

사드 논란을 보면서 마르세유를 떠올리는 이유는, 경북 성주와 단순 비교는 힘들지만 ‘안보는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불변의 원칙 때문이다. 예부터 참외와 수박으로 사랑받아온 성주는 ‘마지막 선비’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을 비롯해 임진왜란 때의 배덕문, 조선조의 박영서·배극렴 등 올곧은 인물의 고장이기도 하다. 심산은 일제에 체포돼 재판에 회부되자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 있나”라며 인정 신문부터 거부했다. 성주군민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다. 전자파 우려, 북한이나 중국의 공격 타깃이 될 것이란 주장은 허구다. 결국 ‘우리 지역엔 안 된다’는 것이다. 상소문 이벤트를 벌인 성주 유림은 조국 없이는 내 고장도 없다던 심산의 절규를 이해하는지 의문스럽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패전 책임을 마르세유에 돌릴 수 없듯이 누구도 성주에 돌을 던질 수는 없다. 당시 프랑스 제3 공화국 정부는 안보에 무능했고, ‘더 이상의 국가 유린을 막는다’는 이유로 항전을 중단했을 만큼 유약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박근혜정부와 군 당국의 대응에 한심한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다른 곳으로 결정됐더라도 그 지역의 반발 역시 성주보다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행 과정의 잘못과 책임을 따지는 것과, 안보 차원의 결단 자체를 저지하고 나서는 것은 그 차원이 다르다.

지금 전반적 상황을 보면 공동체와 시민 의식을 중시하는 ‘공화주의’ 국가인지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송전탑 설치는 한사코 거부하면서 신공항은 갖겠다던 밀양에 비하면 성주는 약과다. 여당 국회의원들이 집단으로 사드의 발목을 잡고, 다음 대통령을 노리는 인사조차 대안 없는 반대를 외치고 있다. 한창 진행 중인 여야 정당의 당권 경쟁에는 국가는 없고 당파만 있다. 진경준·홍만표·나향욱·우병우·홍기택·김정주에서 보듯 관료와 엘리트의 타락도 심각하다. 헌법재판소조차 포퓰리즘에 흔들린다. 공론을 이끌어야 할 지식인과 과학자들이 괴담을 증폭시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기득권 노조는 자식 세대의 일자리를 뺏고 있다.

원래 이런 나라가 아니었다. 산업화·민주화 못지않게 ‘안보’에서도 기적을 일궈냈다. 6·25 폐허 위에서 한·미 동맹을 ‘쟁취’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50달러 수준이었고, 문맹률은 70%를 넘었다. 조세 수입이 국가 예산의 15%에 불과해 미국 원조물자를 팔아 예산에 충당(대충자금)했다. 그 비중이 1957년과 1958년에는 54%에 달했고, 예산 독립은 1973년에야 가능했던 ‘거지 국가’였다. 이런 와중에도 자유민주주의를 안착시키고, 방위비에 예산의 30%를 투입해 북한을 따라잡았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했다. 국민이 똘똘 뭉쳐 국난 극복에 나선 마지막 사례는 1997년 외환위기 때의 ‘금모으기운동’일 것이다. 그 뒤 20년도 안 돼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치의 실패, 국가 리더십의 실패에 1차적 책임이 있다. 그런 지도자, 그런 정치를 국민이 선택했으니 국민의 각성이 절실하다.

가위 국민 휴가 주일이다. 고속도로 이용 차량 대수, 인천공항 출국자는 연일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한편으론 ‘헬조선’ 주장이 넘쳐난다. 지도층과 부유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저버리고, 국민은 국가에 기여하기보다 기대려 한다. 정치권과 유권자는 포퓰리즘의 악순환에 빠져들고 있다. 국가에 대한 의무, ‘애국’은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을 위해 헌신한 세대의 애국정신을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 그러면 현 세대의 과제인 복지·분배의 압축 발전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드 논란은 이런 것을 각성시키는 역사의 회초리다. 마침 오는 15일은 광복절이자 정부수립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