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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게재 일자 : 2016년 08월 05일(金)
커피 한 잔의 여유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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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태 소설가

햇볕 짱짱한 여름날 오후 커피 한 잔 마시기 위해 40분간 차를 몰고 담양읍까지 갔다. 차를 몰고 가면서, 고등학생인 내게 검은 진주 빛깔 커피를 끓여주셨던 김현승 시인을 생각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시를 써 가지고 갈 때마다, 선생님은 손수 커피를 끓여 주시곤 했다. “고독을 견디려고 커피를 마신다”던 선생님 말씀도 생각난다. 1960년대 조선대 교수였던 선생님은 매일 퇴근하면 충장로까지 1시간을 걸어 노벨다방에서 홀로 커피를 마셨다. 한번은 수업을 마치고 교복을 입은 채 다방으로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커피 대신 칼피스를 사주시며 “칼피스 맛은 첫사랑 맛이야. 첫사랑 맛은 달콤하면서도 톡 쏘거든” 하며 웃으셨다.

나도 몇 년 전부터 커피 잘 내려주는 찻집을 찾아다니는 것을 간질간질한 즐거움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유명한 강릉 B커피숍은 물론, 양평이며 우리 집에서 가까운 여수, 순천, 정읍, 고창의 커피 전문점을 찾아다닌 지 오래다. 최근에는 남원에 있는 커피숍에서 다크 초콜릿 맛 나는 예멘 모카 마타리를 마신 후, 그 뒷맛의 여운을 못 잊어 가끔 찾는다.

메타프로방스는 담양 메타세쿼이아 숲에 조성된 유럽풍 관광단지다. 이곳에 M커피점이 생겼는데 한갓지고 분위기가 괜찮다. 나는 콜롬비아 슈프리모와 과테말라 안티구아를 놓고 고민하다가 안티구아를 주문했다. 두 가지 모두 스모키한 향이 강하다. 내가 처음 핸드드립에 매료되었을 때는 맛과 향의 밸런스가 적당하고 뒷맛이 깔끔한 케냐와, 신맛과 바디감이 좋은 예가체프를 사랑했다. 그런데 안티구아 맛을 본 후로는 스모키한 향기에 푹 빠지고 말았다. 고급 스모크 커피 안티구아는 약간 타는 듯한 냇내 외에도 신맛, 단맛, 쓴맛, 초콜릿 맛의 균형이 잘 잡히고 특히 묵직한 바디감이 좋다. 여러 가지 커피를 자주 마시면 혀가 진화하는 것 같다.

안티구아를 마실 때마다 나는 기분이 울연(鬱然)해진다. 인구 3만의 안티구아는 1821년에 과테말라가 독립하기까지 300년간 식민지시대 수도로 상처가 많은 도시다. 1776년에 해발 2000m의 아구아 화산 폭발로 도시가 파괴됐는가 하면, 독립 후 인디오들은 그들의 권익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가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마야 문명의 후예들로, 몽고점을 가진 인디오 15만 명이 커피 농장에서 일하다 죽은 것이다. 나는 인디오들의 검은 눈물과도 같은 안티구아를 마셨다. 아주 천천히 슬픈 영혼들을 생각하며 연기를 품은 듯한 맛을 음미했다. 커피 향이 쩌릿쩌릿 온몸으로 퍼졌다. 커피는 향기와 맛을 동시에 느끼며 마셔야 한다. 그래서 커피는 코와 혀와 목젖으로 마신 후, 입과 목에 남은 여운의 맛까지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커피는 목이 말라서 마시는 음료가 아니다. 커피 한 잔 안에는 행복과 사랑, 위로 등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시고 쓰고 달고 탄 맛에 젖어 잔잔한 행복감에 빠진다. 커피 한 잔의 행복은 시들어가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연소시킬 힘을 준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가, 커피가 창작의 열정을 불태워주는 연료라고 생각하고 즐긴 것일까. ‘커피 칸타타’를 작곡한 바흐는 “커피 맛은 천 번의 키스보다 달콤하다”고 했고, 베토벤은 “커피가 작곡의 원동력”이라면서 아침마다 60알의 원두를 갈아 마셨다. 박목월 시인은 “암갈색 심연을 혼자 마신다”고 했으며, 신달자 시인은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문학노동자라고 부르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커피 이야기는 너무도 슬프고 안타깝다. 가난한 발자크는 우크라이나 여자 한스카 백작 부인을 사랑했다. 발자크는 18년 동안 그녀와 팬레터를 주고받은 끝에 청혼했다. 한스카 부인은 남편이 죽은 다음에 결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발자크는 그녀와 같이 살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매일 50잔의 커피를 마시고 줄기차게 소설을 썼다. 마침내 한스카의 남편이 죽자 발자크는 51세가 되어서야 결혼했다. 그러나 발자크는 결혼 5개월 만에 카페인 과다 복용으로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은 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국 여인에게 보낸 편지’가 4권의 책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나는 오랜 시간 혀끝에 맴도는 커피 잔향(殘香)에 취해 분위기 좋은 ‘제3의 공간’에서 자신을 충분히 해체시켰다. 커피는 여럿이 이야기하며 마시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시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보다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여유를 갖고 생각하며 마시는 것이 더 행복하다. 때로는 자신을 여유로운 공간에 가둘 때 자아가 확실해져 살아갈 방향이 뚜렷이 보인다.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로사회’에서 몸도 정신도 지칠 대로 지친 채 쫓기듯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제1의 공간인 가정과 제2의 공간인 직장, 그리고 삶의 쉼표를 찍을 수 있는 나만의 여유로운 제3의 공간이 필요하다. LG에서 10년간 전문 경영인으로 일하고 프랑스로 돌아간 에리크 쉬르데주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한국은 미쳤다!’는 책을 썼다. 이제 우리도 그의 말 대로 ‘일하는 기계’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여유로운 삶이 필요하다. 역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몰고 돌아오면서 고등학교 시절 김현승 선생님 댁에서 처음 마셨던 ‘악마의 유혹’ 같은 쓰디쓴 커피 맛을 다시 떠올렸다. 그 추억은 지금껏 소중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나도 바리스타 교육을 받아 나만의 커피숍을 만들어 놓고, 나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커피를 끓여주어, 그들에게도 영원히 남을 추억을 심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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