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와 나>“긴 특허소송으로 심신 만신창이 됐을 때 골프만이 위로”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억기 ㈜쎄번 회장이 지난 9일 서울 구로구 오류동 동도 센트리움 골프연습장에 마련된 천연잔디 그린에서 퍼팅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 이억기 ㈜쎄번 회장

사장이 골프에 빠지면 망해
접대도 말고 그냥 즐겨야

김효주·김시우·이수민 배출
육민관中·高 골프부 창설 주역
한 해 1억원 이상 지원금 쾌척

15년간 국산 클럽만 쓰면서
2006년 생애 유일 클럽챔프에
2009년 6언더 라이프베스트

이억기(63) ㈜쎄번 회장은 골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구로구 오류동 자택 근처의 동도 센트리움 골프연습장에서 만난 이 회장은 35년 동안 기업인으로 살아온 인생 이야기부터 풀어놨다. 20대부터 기업을 일구는 등 혹독한 과정을 살아왔다는 이 회장은 “한때 유망한 벤처기업가로 명성을 날렸다”며 “미국 기업과 5년 가까운 특허전쟁을 치르면서 만신창이가 됐지만 골프를 통해 건강을 되찾고, 지금은 누구보다도 골프를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골프채를 잡은 것은 올해로 꼭 30년째가 된다. 1986년 제조업을 하면서 회사를 키우느라 바쁘게 지냈던 때였다. 골프 역시 일만큼 열심이었다. 마침 회사 옆에 골프연습장이 있어 출퇴근하면서 배웠다. 티칭프로가 7번 아이언만 쓰라고 했지만, 코치 몰래 스윙의 메커니즘도 모른 채 치다가 갈비뼈에 금이 가 병원 신세도 졌다. 이렇게 3개월 정도 연습하고 머리 얹으러 가 첫 라운드에서 109타를 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년 반 정도 지나 싱글패를 받았다. 당시는 81타를 치더라도 싱글패를 만들어줬다. 이후 필드에 나갈 때마다 타수가 낮아졌고, 안정적인 싱글 핸디캐퍼 반열에 올랐다.

강원 평창군 출신인 이 회장은 서울로 상경해 27세이던 1979년 전자부품 제조업이던 평창산업㈜를 창업했다. 처음엔 전자부품 제조로 시작했지만 인건비 상승 등 여건이 변화하면서 자체 기술로 반도체 검사 장비를 만들어 하이닉스, 삼성, LG반도체에 납품하며 고속 성장해 왔다. 이 회장이 개발한 ‘맴스(MEMS)테크놀러지’는 학자들의 학문(논문)으로만 존재하던 기술을 상용한 성공사례로 꼽힌다. 당시 430억 원대를 투자, 개발해 1년 반 만에 코스닥 최우량기업이 됐다.

하지만 2000년 코스닥에 상장하자마자 비슷한 상호를 가진 평창정보통신의 금융 스캔들이 터져 1주일 새 30% 이상 주가가 빠졌다. 전혀 관계가 없는 회사였지만 도저히 지탱할 수 없어 상호를 평창하이테크산업(PHICOM·파이컴)으로 바꿔 위기를 넘겼다. 한 품목으로만 첫해 300억 원 매출에 100억 원의 순이익, 이듬해 500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국내에서 벤처 기업에 주는 상이란 상은 다 휩쓸었다.

초고속 성장으로 잘나가던 2004년 미국의 경쟁사가 이 회장을 상대로 기술을 침해했다며 특허소송을 걸었다. 특허소송은 4건이었지만 세부 청구항목은 400건이나 돼 미국 전역의 법정을 다녀야 했다. 이 기간 쌓은 항공 마일리지는 200만 마일이 됐다. 2009년까지 60개월 동안 소송비용이 250억 원이나 들었다. 이 회장은 이 기간 생산영업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소송과 개발연구만 맡아왔다. 소송 전부를 승소했지만 후유증은 컸다. 이 회장은 몸을 돌보지 않은 탓에 중병에 시달렸다. “일을 계속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무조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는 의사의 권고대로 이 회장은 회사 지분 정리 후 자연인 상태로 제주에 내려갔다. 이 회장은 소송을 위해 미국으로 갔을 때에도 틈틈이 골프를 쳤다. 이 회장은 “아마 골프라도 치질 않았다면 난관을 극복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 덕분에 이 회장의 골프 전성기는 한창 소송 중이던 2006년 시작됐다. 2000년 개장한 제주 핀크스 골프장 회원이 된 이 회장은 2006년 3연패를 노리던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을 물리치고 클럽 챔피언에 올랐다. 지금까지 클럽챔피언전에 16차례 출전했지만 우승은 이때가 유일했다. 이 회장은 당시 7360야드의 풀백 티에서 챔피언전 마지막 날 74타를 쳐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최저타 기록을 남겼다.

7년 전 발안 골프장에서 6언더파 66타를 친 게 베스트스코어. 이 회장은 “홀인원을 3차례 했지만, 공식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2차례뿐”이라고 말했다. 10년 전 아시아나골프장 서코스 8번 홀(파3·204야드)에서 7번 우드를 잡고 너무 크게 쳐 그린을 훌쩍 넘긴 뒤 잠정구를 친 게 홀인원이 됐다. 동반자들이 “좋은 구경거리를 봤으니 빈손으로 보낼 수 없다”며 ‘OB 홀인원 기념패’를 만들어 줬다. 정식 홀인원에 목말라 있던 이 회장은 5년 전 발안 골프장에서 공식 홀인원을 한 데 이어 지난해 페럼 골프장 6번 홀(파3·175야드)에서 6번 아이언으로 또다시 행운을 안았다.

이 회장은 이달 초 강원 춘천의 라비에벨 골프장 올드코스에서 76타를 쳤다. 요즘도 70대는 무난히 기록한다는 이 회장의 골프 파트너는 주로 40∼50대 후배들이라고. 이 회장이 후배 기업인들에게 빼놓지 않는 ‘잔소리’가 있다. 사장이 골프에 너무 빠져 회사가 망하는 것을 많이 목격했기에 골프를 접대나 비즈니스 도구로 삼지 말고, 오직 골프를 치는 데만 몰입하고 ‘엔조이’만 하라고 강조한다.

이 회장은 요즘 골프 명문으로 부상한 강원 원주의 육민관중·고교의 골프부를 만든 주역이다. 이 학교 출신(1974년 졸업)인 이 회장은 2006년 골프부를 만들면서 한동안 한 해에 지원금으로 1억 원 이상 내놓기도 했다. 당시 김효주와 박지영이 중학생, 조윤지가 고교생이었다. 김시우, 이수민, 김규민 등도 이 학교 골프부 출신이다.

평생 제조업만 고집해온 이 회장은 제품을 만들면서 어렵지만 독자적인 기술 개발을 해온 덕에 단 1센트도 로열티를 준 적 없는 것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 기업을 떠나 자연인으로 살던 이 회장은 2013년 경남 김해에서 가스버너를 제조 판매하는 회사를 인수하면서 경영일선으로 복귀했다. 표면연소를 통해 배기가스가 적게 배출되는 고효율 버너를 생산해 유명 보일러 회사에 공급하고 있다. 이 회장의 골프 백을 보면 ‘국산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이언에서부터 드라이버까지 풀세트를 ‘나이센’이라는 국산 브랜드를 15년 전부터 애용해 오고 있다.

최명식 기자 ms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