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기업이 권력에 ‘No’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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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평 논설위원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건 자업자득이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개발연대나 강권 통치 시절의 축축한 거래를 답습한다는 말인가. 미르·K스포츠재단, 어버이연합 등에 연루된 잇단 스캔들은 신판 정경유착의 냄새가 난다. ‘자유시장경제와 건전한 국민 경제’를 앞세운 조직으로선 민망한 처신이다. 회원 기업들마저 마뜩잖은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고립무원이다. 처절한 개혁을 통해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회복해야 활로가 있다.

정부 주도 재단에 기업이 돈을 거둬준 것은 박근혜정부 들어 7건, 2100억 원이 넘는다. 불우이웃 성금, 세월호 성금, 전통시장 상품권 매입 등 이런저런 명목을 합치면 훨씬 불어난다. 이명박정부의 유산인 미소금융·동반성장기금에도 매년 수백억 원씩 내고 있다. 한데 일련의 기부금 모금에서 모든 죄를 전경련에 씌우는 것은 온당한가. 전경련은 이 과정에서 중개·전달자 역할을 맡았다. 구시대 문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분명하지만, 사안의 본질은 기업이 권력과의 관계에서 지금은 자유로운가 아닌가다. 대기업 사이에는 정권 눈에 들 필요는 없다 해도 최소한 밉보이지는 않으려는 정서가 여전하다. 상황이 그렇다면 기업 처지를 대행한 전경련 역시 가해자보다 피해자에 가깝다.

만일 정권의 실세가 기부금 납부를 강요했다면 범죄다. 그러니 내라는 쪽이나 내는 쪽이나 강제성을 부인하는 게 상례다. 결국 자발성이 관건인데, 판단해볼 방법이 없진 않다. 순수하게 기업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기업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업에 먼저 돈을 내겠다고 나섰다? 그런 경영자라면 그 무섭다는 배임죄에 걸리기 딱 알맞다. 또 하나는 매번 절묘한 비율로 이뤄지는 ‘할당’이다. 대기업 모금에는 거의 예외 없이 삼성이 먼저 나서고, 이후 현대차·SK·LG 등 다른 기업이 재계 서열에 따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성의’를 표시해왔다. 온전한 자발성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박 정부가 기업 도움으로 벌인 사업들은 저마다 명분이 차고 넘친다. 박 대통령이 2000만 원+월급 20%를 내며 직접 깃발을 든 청년희망펀드만 해도 청년실업 해소라는, 모두 공감하는 시대적 난제가 중심에 있다. 지금까지 모인 1450억 원 중 기업이 70% 정도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쌓인 돈으로 뭘 할지는 분명치 않다. 실적이 신통찮아서 그렇지 정부의 일자리 예산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대기업이 낼 돈으로 채용을 늘렸다면 청년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대기업을 모든 시·도와 짝짓기시킨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창의적이어야 할 사업에 구태의연한 방식을 동원한 사례다.

기부금 낼 돈으로 떳떳하게 법인세를 더 내라는 야당의 주장은 일종의 반간계(反間計)로 보이지만, 호소력이 있다. 하지만 저간의 행적을 보면 자가당착이다. 여야는 지난해 말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 대가로 ‘농어촌 상생협력기금’ 조성에 합의했다. 민간 기업 등에서 매년 1000억 원씩 10년간 1조 원을 걷기로 한 것이다. FTA로 수익을 더 올렸다면 기부금이 아니라 법인세로 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야당 논리 아닌가. 그런데도 야당은 이번 국감에서 조속한 집행을 압박하고 있다. 야당이 기업을 위한다면 한 해 법인세수보다 많다는 각종 준조세를 대폭 줄이는 것이 우선이다.

정책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기업은 정부와 이해관계자다. 그런 관계에서 정부가 하는 일에 설령 자발적이라고 해도 돈을 대는 것은 김영란법이 금지한 부정청탁 성격이 농후하다. 국민은 단순 교제까지 촘촘한 그물로 묶어놓고 기관이나 법인이라는 이유로 ‘돈거래’가 괜찮다는 건 정의롭지 않다. 개인기업이 아닌 법인의 ‘묻지 마 기부’는 주주의 재산권 침해 여지도 있다.

정부가 정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업은 세금을 쓰는 게 정도(正道)다. 예산 절차 없이 준조세를 남발하고, 기부금을 모금하는 관행 뒤에는 정치적 의도나 관료 이기주의가 숨어 있다. 기업을 수시로 줄 세우고, 돈 뜯는 정치부터 사라져야 한다. 전경련의 최대 과오는 권력의 시대착오적 ‘부정청탁’에 당당히 맞서지 못한 것이다. 그 이전에 글로벌 기업을 자처하는 국내 대기업들부터 정권의 손짓·고갯짓에 ‘No’라고 할 수 있어야 했다. 기업 스스로 약자를 자처하면 권력이 거리낌 없이 그 틈을 파고드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