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북한의 연필은 부러졌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제교 정치부 차장

로널드 레이건호의 별칭은 기퍼(Gipper)다. ‘위대한 영도자’라는 의미다. 미국민들이 불렀던 레이건 대통령의 애칭을 핵항모에 붙였다. 기퍼는 12일 현재 한반도 해역에서 ‘2016 불굴의 의지’(작전명) 훈련 중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수신인으로 핵·미사일 도발 시 선제타격 불사의 경고장을 보내고 있다. 공교롭게도 레이건은 역사에서 소련을 붕괴로 이끌고, 공산주의를 청산한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미 핵항모, 핵잠수함, 핵폭격기 등 전략자산이 한반도로 집중되고 있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초강경으로 선회했다는 신호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존 울프스탈 군축·비확산 선임국장의 ‘연필’ 언급은 북한을 옴짝달싹 못 하도록 묶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워싱턴DC 우드로 윌슨 센터에서 9월 21일 열린 ‘제4차 한·미 대화’ 세미나에서 “연필 한 자루건, 금 1온스건, 석탄 한 무더기건 인도적 지원 목적이 증명되지 않으면 대북 수출은 금지된다”고 단언했다. 국내 언론에는 ‘북한 핵개발 관련, 연필 한 자루도 안 돼’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좌파 지식인들은 건국 초기 북한을 매력적인 나라로 여겼다. 지금 동북아의 골칫덩이, 세계의 문제아로 전락한 미래를 보지 못했다. 북한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깃발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지주들에게 토지를 몰수했고, 혁명화 교육을 통해 공산주의 이념을 대중에게 전파해 나갔다. 김일성은 ‘인민의 낙원’ 건설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소련을 등에 업고 한반도 전체를 공산주의화하는 전쟁 준비에도 전념했다. 결과는 불과 몇 년 뒤 수백만 명이 희생된 한국전쟁으로 나타났다. 한반도는 이념대립에 휩싸여 전화(戰火)를 겪어야 했다.

‘연필’은 북한이 국가기구 차원에서 첫 번째로 다뤘던 의제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2월 20일 1차 회의에서 ‘연필 생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이었다. 당시 북한의 문맹률은 70%, 인민들에게 공산주의 이념을 주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필이 필요했다. 공동생산·분배의 이상국가로 나가는 혁명화 도구였던 셈이다. 많은 좌파 지식인은 북한에 희망과 미래가 있다고 보고 월북을 선택했다.

지금 북한의 연필은 부러졌다. 고장 난 이념을 주체사상으로 땜질하고, 3대 세습체제에 충성을 종용하고 있다. 남한 정착 탈북자만 3만 명, ‘인민의 낙원’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국내 좌파 진영은 대화와 타협, 협상의 대북정책을 외치고 있다. 사드 미사일 한반도 배치 논의 중단도 촉구하고 있다. 레이건은 소련과 군비지출 경쟁을 벌였다. 미사일방어시스템의 원형인 전략방위구상(SDI)도 밀어붙였다. 미·소 군축 협상장에서 “도버야이 노 프로버야이”라고 말하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다그쳤다. ‘신뢰는 하지만 입증하라’는 러시아 경구다. 협상은 신뢰를 필요로 하고, 신뢰는 입증에서 나온다. 과거 핵시설 폐기 협상 과정에서 북한은 한 번도 제대로 입증을 하지 않았다. 북한에 있어 시간은 핵무기를 증산하는 중요자원이다. 70년 전 좌파 지식인들의 오류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jk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