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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6년 11월 02일(水)
“세상 모든 일이 임금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 인조에 忠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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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19) 부끄럽지 않은 삶… 조선 중기 文臣 김집

남들은 군자가 늘 자족한다 하지만 人云君子長自足

나는 군자가 늘 부족해 한다 말하지 我謂君子長不足

남들은 소인이 늘 부족해 한다 하지만 人云小人長不足

나는 소인이 늘 자족한다 말하지 我謂小人長自足

그대 보듯 군자는 자기 책망 두터워서 君看君子責己厚

그만하면 족한데도 부족하다 여기지만 已足猶自爲不足

내 보기에 소인은 자기 갖추는 데 소홀해서 我見小人待己廉

부족한데 도리어 만족한다 여기지 不足還自爲滿足


이것은 김집이 쓴 ‘족부족(足不足)’이란 시의 일부다. 흔히 군자는 욕망을 버리고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자신이 가진 것에 불만을 품고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그러나 김집은 반대로 생각했다.

그에게 군자란 언제나 자신의 수양 부족을 불만족스러워하는 존재였고, 반면에 소인은 수양이 부족해도 그것으로 만족하는 존재였다. 이 시에도 현재의 수양 공부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했던 그의 올곧은 성품이 오롯이 담겨 있다.

김집은 말을 배우자마자 곧바로 글자를 깨쳤던 남달리 영특한 아이였다. 3세 때 이미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입에 손가락을 세우고선 이것이 ‘중(中)’ 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이가 5, 6세 때부터 무리지어 놀거나 희학질하는 법이 없었고, 손님에게 예의를 갖출 줄 알았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예조 참판을 지냈으면서도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로 유명했던 김계휘(金繼輝)였고, 그의 아버지는 조선 예학의 선구자 김장생(金長生)이었다. 위 시에 나타난 김집의 굳센 성정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가풍(家風)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김집은 8세 때부터 송상현(宋象賢)과 송익필(宋翼弼)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주희(朱熹)가 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읽기 시작했다. 남들은 ‘천자문’이나 겨우 뗄 나이에 그는 중국 역사서를 읽을 정도로 문리(文理)가 트였다. 18세 때는 진사 시험에 2등으로 합격했다. 관례(冠禮)를 치르기도 전이었지만, 문장과 필체가 뛰어나 김계휘가 손자를 잘 두었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이처럼 김집은 어려서부터 문필이 화려했지만, 자라면서는 그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고 오로지 성현의 학문에만 전념했다. 또 그는 글씨를 여사(餘事)로 여겼지만, 획이 바르고 힘이 있어 그의 필적을 얻은 이는 세상에서 구하기 어려운 보물로 여겼다.

김집은 37세 때 처음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40세 때(광해군 5년, 1613)는 철원 부사로 재직하던 아버지가 계축옥사에 연루되는 것을 목격하고 더더욱 관직에 뜻을 두지 않게 되었다. 계축옥사는 광해군 때 집권한 대북(大北) 세력이 정권에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영창대군은 선조의 14명 아들 중 유일한 적자(嫡子)였다. 이때 김장생의 서제(庶弟)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이 고문 끝에 옥사했고, 김장생도 연좌되었으나 심문 과정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당시 김집은 철원에 있다가 서울로 가서 사건이 마무리되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 연산(連山)으로 돌아갔다.

계축옥사 이후 10년간 학문에만 매진하던 김집이 다시 관직에 나간 것은 그가 50세 되던 해(1623)였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 세력이 정권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은둔한 산림(山林)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김집에게도 6품직이 제수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조정에서는 김집에게 사헌부의 일을 맡기려 했지만, 김집이 부모님 봉양에 편리한 고을을 원해서 부여 현감(종6품)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정묘호란(1627)이 일어나던 해(54세)까지 부여에서 선정을 펼치다가 그해 7월에 병으로 사임했다. 이듬해 11월엔 임피 현령(종5품)에 임명되었지만, 다음해 7월에 곧바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엄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부임은 했지만, 아버지 곁을 오래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57세 되던 해에는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종6품)과 전라도사(全羅都事·종5품)에 제수되었으나, 팔순이 넘은 아버지를 가까이서 봉양하기 위해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김집이 60세 되던 해(1633)에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치자 그 이듬해부터 인조는 그를 조정의 요직으로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60대 전반에는 주로 사헌부의 지평(정5품·61세), 장령(정4품·63세), 집의(정3품·63세) 등의 벼슬이 내려졌고, 60대 후반에는 승정원의 동부승지(정3품·66세)와 우부승지(정3품) 등의 직책이 주어졌다. 70대에는 세자시강원 찬선(정3품·74세), 공조참의(정3품·76세) 등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경연에 참석한 것 외에는 그가 인조의 조정에서 실제로 봉직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인조가 반정의 명분과 그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산림을 대거 초치하기는 했지만, 산림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김집은 경연 석상에서 임금 인조에게 뼈 있는 말을 남겼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임금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이다.” 김집의 이 말에 인조도 “나더러 성실성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그는 또다시 임금에게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고 충고했다. 당시 그는 66세의 원로였지만, 전혀 노회하지 않았다.

인조에 이어 효종도 김집을 조정의 요직으로 불렀다. 김집은 효종이 즉위한 해(1649)에 76세의 나이로 예조참판, 공조참판(종2품), 사헌부 대사헌(종2품)에 임명되었지만,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대신 김집은 대사헌을 사직하는 상소문 끝에 정치하는 도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소리했다.

“임금으로서 남의 말을 듣는 도리는 오직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데 있을 뿐이다. 상대의 말이 혹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해 말할 때는 반드시 조용하고 평온하게 해서 화기(和氣)를 잃지 말아야 한다. 갑자기 불평을 터뜨려 신하들로 하여금 임금 도량의 얕고 깊음을 논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바른 정치의 시작은 여러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청정(聽政)에 있음을 환기하는 말이었다.

김집의 거듭된 사직 요청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그를 공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정2품)로 불러들였다. 특히 대사헌과 이조판서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인재를 선발하는 책임을 진 자리였다. 그러나 김집은 이조판서 재직 시 우의정 김육(金堉)과 대동법(大同法) 및 인사권 문제로 마찰을 빚고 말았다. 당시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건의하며 인사권은 임금의 고유 권한이므로 아랫사람이 마음대로 행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동법 시행을 반대하며 원로대신에게 인재 선발을 의뢰하자고 했던 김집의 제안에 맞선 건의였다.

그러나 김집도 대동법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대동법 실시를 반대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정치의 체계를 먼저 바로잡고 세세한 절목(節目)을 고치는 것이 개혁의 순서라는 것이었다. 둘째, 개혁이 초래할 부정적 효과를 신중히 검토한 뒤에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집의 반대에 대해 김육은 “시대의 조류를 거스르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반발했다. 김집도 그 말을 듣고 소름이 끼쳐 안정이 안 된다며 결국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효종 1년(1650) 1월 그가 77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해 3월에는 청나라가 6명의 사신을 한꺼번에 파견해 김상헌(金尙憲)과 김집을 북벌론의 주모자로 지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집의 제자였던 송준길(宋浚吉)이 인조반정의 공신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자, 김자점이 청나라를 동원해 자신의 세력을 만회하려고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조선의 내정을 청나라에 밀고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다행히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등이 적극 주선하고 효종도 직접 수습에 나서 사태가 확산되진 않았지만, 김집은 조정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하고 다시는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아버지 김장생이 저술한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감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이 작업을 위해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이 후에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으로 출간되었다. 그 외에 그는 76세 때 효종에게 예제(禮制) 개혁을 건의하기 위해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를 집필했다.

김집은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남에게 보낼 서찰도 손수 쓸 정도로 평소와 다름없이 몸단속을 단정히 했다. 그러면서 주위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고 사는 이치에 훤하기 때문에 흔들리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것만은 옛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다.”

김집은 평소 “혼자 갈 땐 그림자에도 부끄럽지 않고, 혼자 잘 땐 이불에도 부끄럽지 않다(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는 진덕수(陳德秀)의 말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늘그막에 서재의 편액(扁額)에 ‘신독(愼獨)’ 두 글자를 새겨두었다. 신독은 ‘대학’에 나오는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야 한다(君子必愼其獨也)”는 말을 줄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김집을 신독재(愼獨齋) 선생이라 불렀다.

그는 낮을지언정 높아지려 하지 않았고, 서투를지언정 겉만 꾸미려 하지 않았다(寧卑無高 寧拙無巧). 그는 세속이 추구하는 것과 반대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신념과 학문은 고종 20년(1883) 단행된 문묘 종사로 국가에 의해 공인되었다. 그의 사후 227년 만의 일이었다. (문화일보 2016년 10월 5일자 26면 18회 참조)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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