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탁구도 선거운동도… 힘들때마다 ‘한번 더’ 정신으로 이겨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유승민 IOC 선수위원이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IOC 선수위원으로서 특히 선수의 복지와 지도자의 처우 개선에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곽성호 기자 tray92@

유승민IOC 선수위원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의 열기가 뜨겁던 지난 8월 19일 브라질 리우에서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2004 아테네올림픽 탁구 남자단식 금메달리스트인 유승민(34)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당선된 것이다. 낮은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유승민은 1544표를 얻어 펜싱의 브리타 하이데만(독일·1603표)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수영의 다니엘 주르터(헝가리·1469표), 육상의 옐레나 이신바예바(러시아·1365표) 등 세계적인 스타들을 제쳤다. 유승민은 사실상 한국의 유일한 IOC 위원이다. 이건희(74) IOC 위원은 건강이 좋지 않아 활동할 수 없고, 문대성(40) 선수위원은 리우올림픽 이후 임기가 종료됐기 때문. IOC 선수위원은 임기 8년으로 올림픽 개최지 선정은 물론 올림픽 종목 결정 등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등 IOC 위원과 같은 권한을 누린다. 세계 어디서나 국빈 대접을 받기 때문에 출입국 시 비자가 필요 없다. 말 그대로 ‘체육 외교관’이라고 할 수 있다.

IOC 선수위원으로 당선된 지 2개월 반 정도가 흐른 지금 유승민은 해외와 국내를 오가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유승민 선수위원은 “정신없이 바쁘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는 인터뷰 바로 다음 날인 3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리는 IOC 선수위원 총회와 IOC 분과위원회 참석을 위해 출국했다.

유 위원은 “모든 것이 처음이라 생소하지만, 결국 스포츠와 관련된 일이니 업무를 빨리 파악하겠다”며 “회의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해야 한국 선수들에게 혜택이 돌아온다고 생각하기에 더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IOC 선수위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12년 전인 2004년이다. ‘금빛 발차기’로 아테네올림픽 태권도 80㎏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문대성 전 선수위원과 올림픽선수촌에서 같은 동을 쓴 것이 인연의 출발. 당시 유승민은 IOC 선수위원을 목표로 삼은 문대성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4년 뒤인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문대성은 IOC 선수위원에 출마했고, 선거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유 위원은 “문 선배가 태권도복을 입고 선거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한번…’이라는 막연한 꿈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1년 피스앤드스포츠컵 국제탁구대회에서 유승민은 IOC 선수위원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굳혔다. 북한의 김혁봉과 조를 이뤄 남자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스포츠의 힘을 경험했기 때문. 결승전 이전까지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누지 않았을 만큼 냉랭한 분위기였지만 우승한 뒤엔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격려했다. 유승민은 이 순간 스포츠의 힘을 느꼈고, 체육 행정을 통해 스포츠 발전의 밑거름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IOC 선수위원이 되기까지 과정은 험난했다. 리우올림픽 기간에 펼쳐진 선거에 호기롭게 뛰어들었지만, 육상 장대높이뛰기의 ‘미녀새’ 이신바예바 같은 월드 스타에 비해 유승민은 무명에 가까웠다. 투표권을 지닌 선수들의 반응도 차가웠다. 유 위원은 “경기에서 진 선수인지 모르고 다가가 말을 걸었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선수들의 기분을 파악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IOC가 정한 빡빡한 선거운동 규정도 발목을 잡았다. 반드시 혼자 선거운동을 해야 했고, 언론 인터뷰는 철저하게 금지됐다. 특히 선수촌 식당 등 선거운동이 제한된 공간이 많았다. 그는 “한 번은 외국인 코치가 오더니 ‘여기가 선거운동이 허락된 곳이냐?’며 시비를 걸어왔다”며 “허용된 곳이라고 대답했더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기억했다. 유 위원은 “27일의 선거운동 기간이 27년처럼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근성으로 이겨냈다. 하루 14시간, 26㎞를 걸어 다니며 선거운동을 벌였다. 매일 3만5000보의 걸음으로 올림픽선수촌 이곳저곳을 누비며 선수들을 만났다. 유 위원은 “선거운동 첫날부터 선거운동을 한 후보는 나밖에 없었다”며 “그래서 뽑힐 자신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유 위원의 독기는 어린 시절부터 유명했다. 별명은 ‘독사’. 유치원을 다니던 7세 때 탁구 동호회에서 운동하던 아버지 유우형(61) 씨의 권유로 라켓을 잡은 유승민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9세 때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탁구 천재’로 불릴 만큼 두각을 나타냈던 유승민은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부천 오정초등학교에 다니던 유승민은 아버지에게 오전 6시 학교 근처에 있던 원미산 입구까지 자신을 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학교에서 하는 운동으로는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 그는 양쪽 종아리에 2㎏짜리 모래주머니를 달고 매일같이 원미산을 올랐다.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이 ‘지옥훈련’을 계속했다. 유 위원은 “경기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에 올랐다”며 “이렇게 운동하는 초등학생은 예나 지금이나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어린 유승민의 꿈은 단 하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기에 그는 지옥훈련을 견뎌냈다.

당시 매일 원미산을 오가며 유승민을 뒷바라지했던 아버지는 지금도 든든한 후원자다. 아들이 IOC 선수위원으로 당선된 뒤 바쁜 일정을 소화하자 아버지가 차량의 핸들을 잡고 있다. 이날 인터뷰 장소에도 아버지가 직접 운전해 부자가 도착했고, 아버지는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아들의 곁을 지켰다.

영어공부를 할 때도 녹색 테이블에서처럼 독기를 발휘했다. 지난해 12월 대한체육회 IOC 선수위원 후보 선정 과정에서 유승민과 여자역도의 장미란, 남자사격의 진종오 등이 경쟁했지만, 유승민이 최종적으로 낙점됐다. 유승민은 당시 영어 실력에서 특히 후한 점수를 받았다. IOC는 선수위원의 자격 중 하나로 ‘유창한 영어’를 꼽는다. 그는 포천 동남고등학교 시절인 2000년 10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5개월간 임대선수로 활약했고, 2001년 중국 슈퍼리그에 진출했으며 오스트리아리그도 거쳤다.

유 위원은 “처음 해외에 나갔을 땐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 쩔쩔맸다”며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악바리처럼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고 설명했다. 말을 주고받을 땐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예스” 또는 “오케이”라고 대답했고, 대화가 끝난 뒤엔 상대방이 말했던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며 공부했다. 그는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영어 실력을 높이려면 대화를 자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곤 두려워하지 않고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넸다”며 “나중에는 통역 없이 혼자 계약서를 검토할 정도로 영어가 늘었다”고 말했다. IOC 선수위원장이 직접 진행하는 전화 인터뷰에서 유승민은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유 위원에게 강문수 대표팀 총감독은 큰 영향을 끼쳤다. 2001년 삼성에 입단한 이후 13년간 강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강문수 총감독의 이름 석 자를 꺼내면서 “나 역시 후배들에게 강 감독 같은 선배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유 위원은 “강 감독께선 나를 정말 많이 괴롭혔다”며 “훈련을 끝내고 쉬려고 하면 어김없이 ‘한 번 더’를 외치셨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번에 선거운동을 할 때도 강 감독의 가르침이 큰 도움이 됐다”며 “피곤해 숙소에 들어가야지 하다가도 선수가 한 명 보이면 달려가 인사를 했는데, 모두 강 감독께서 강조하신 ‘한 번 더’ 정신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이젠 선수위원의 명함을 들고 다니면서 제2의 인생을 가꿔야 한다. 2024년까지 그는 한국 스포츠, 아니 IOC를 대표하는 선수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선수위원으로서의 목표는 선수들의 복지 향상. 그는 “아직 IOC 선수위원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지 않아 무엇을 이루겠다기보다는 현재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다”며 “가장 중요한 건 선수들의 복지라고 생각한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극히 일부만이 코치, 교수 등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가는 실정인데, 이에 문제의식을 갖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설명했다. 선수뿐 아니라 지도자들의 처우 개선에도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유 위원은 “나도 삼성생명과 대표팀 코치로 일했기에 지도자가 얼마나 고된지 잘 알고 있다”며 “지도자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역시 뺄 수 없는 과제. 유 위원은 “미약하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며 “특히 강원 평창군이라는 어찌 보면 작은 도시에서 펼쳐지는 동계올림픽이 성공하면 중소도시도 해낼 수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평창동계올림픽은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파문에 휩싸였다. 최 씨가 평창동계올림픽의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과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세계적 행사인 올림픽에 민간인인 최 씨가 개입해 이권을 챙기려 했다는 소식은 정말 충격적”이라며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 위원은 “이번 파문을 전화위복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부정부패,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이럴 때일수록 체육계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우성 기자 applep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