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보수 vs 진보’ 뿌리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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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 유벌 레빈 지음, 조미현 옮김 / 에코리브르

사전적 의미에서 진보(進步)의 반대말은 퇴보(退步)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진보의 반대쪽에 보수(保守)가 있다고 여긴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작가 복거일 씨는 생각이 다르다. 사회를 낫게 만든다는 뜻의 진보를 어느 한쪽이 독점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도 사회를 더욱 낫게 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보수의 반대쪽 용어는 현 질서를 크게 바꾼다는 뜻의 변혁이 맞다고 주장한다.

복 씨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보수-진보’는 한 묶음으로 쓰이는 게 현실이다. 최근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의 이념 정향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트럼프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공약에는 진보, 보수적인 면이 혼합돼 있다.”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 말이다. 최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피해를 받은 백인 노동자를 위한 트럼프의 공약은 진보적이라고 봤다. 반면에 고소득층 감세 정책은 보수적이라고 규정했다.

책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은 미국 정치의 두 축인 보수와 진보의 근원을 탐색한다. 저자 유벌 레빈은 워싱턴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윤리 및 공공 정책 센터 연구원이다. 백악관 국내 정책보좌관을 지낸 사람답게 현실 정치의 구체적 모습을 적절히 예시한다. 저자 스스로는 보수주의자이지만, 진보 쪽에 대해 편향 없이 이야기를 펼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8세기 사상가로서 보수-진보의 원류로 평가받는 에드먼드 버크(왼쪽)와 토머스 페인의 초상. 자료사진

책 제목에 있는 버크(1729∼1797)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정치가이자 문필가로 잘 알려져 있다. 현대 사상의 보수적 기원을 언급할 때 그 출발로 삼는 인물이다. 페인(1737∼1809)은 영국 태생의 미국 이민자로, 런던과 파리에서 변혁을 지지하는 운동가이자 수필가로 활동했다.

두 사람이 활동했던 때는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시대였다. 버크는 정치 경력의 초반 20년을 영국 정치 개혁을 옹호하면서 보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 그 급진주의를 비판하며 영국 정치의 전통을 수호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페인은 미국 독립의 대의를 설파한 책자 ‘상식’으로 미 대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영국의 버크도 미국 독립을 지지했다고 봤기 때문에 동지로 여겼다. 그러나 버크가 서간문 형식의 글 ‘성찰’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비판하자, 페인은 답신 형식의 글 ‘인권’을 통해 버크의 견해를 공박했다.

두 사람의 논쟁은 미국과 영국의 지성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버크는 ‘신휘그가 구휘그에게 올리는 항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치적·철학적 문제의식을 피력했다. 이에 페인은 ‘인권 2부’를 써서 격렬하게 반박했다.

과거의 정치 전통 및 권위에 대한 견해차에서 비롯한 두 사람의 논쟁은 깊이 상충하는 세계관을 드러냈다. 자연과 역사, 정의와 질서, 혁명과 개혁에 대한 이들의 논점은 이후 후대의 정치-사상가들에 의해 보수와 진보의 근원으로 활용됐다.

저자 레빈은 18세기에 가문의 배경 없이 대사상가가 된 버크와 페인에 대해 고루 애정과 존경을 표현한다. 그는 버크가 초기 개혁주의자의 모습에서 변절했다는 비판을 받은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피력한다. 안정과 변화 사이의 균형 찾기를 추구하는 점진적 개혁가로서의 일관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보수 정권의 부패를 보면서 ‘보수(保守)를 끊임없이 보수(補修)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균형 찾기!)

저자에 따르면, 자유와 평등에 대한 페인의 열정은 미국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됐다. 때로 세계 곳곳의 급진 좌파들이 진영 논리의 독선에 페인의 열정을 오용하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했던 국내 진보 진영이 이 협정을 재고하겠다는 트럼프의 주장을 고립주의라고 비난하는 독선!)

트럼프의 예에서 보듯 21세기 세계 각국의 이념 풍경은 좌-우, 진보-보수로 명쾌하게 나누기 어렵다. 그에 따라 합종연횡하는 정치 세력의 판도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레빈의 책은 그 혼란한 풍경 근원에 있는 논쟁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정치 이념이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그것은 미국의 칼럼니스트 페기 누난이 이 책을 읽은 소감으로 대신할 수 있다 . “우파와 좌파는 각각 다르게 이해하긴 했지만 인간의 번영이라는 대의에 정치가 이바지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