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연탄빛 세상… ‘푸른 바다’ 향해 흐르는 江에서 희망을 건지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경북 칠곡군의 낙동강 철교. 구상 시인에게 낙동강은 삶의 근거지이자 ‘강’ 연작시 등 작품 활동의 모티프가 됐다.

57 구상 연작시 ‘江’의 발원지… 경북 칠곡 낙동강·서울 여의도 한강

대중에겐 교과서에 실린 시 ‘초토의 시―적군 묘지 앞에서’로 가장 잘 알려진 구상은 실은 강(江)의 시인이다. 초토의 시 외에도 ‘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 ‘밭일기’ ‘까마귀’ 등 연작시 작업을 많이 한 그는 나이 쉰을 넘긴 1970년대부터 강을 소재로 삼아 100편을 목표로 쓰기 시작하여 총 65편의 ‘강’ 연작시를 남겼다.

고향인 함경남도 덕원에서 마식령산맥으로부터 흘러와 송도원 바다로 유입되는 적전강(赤田江)을 바라보며 자라난 그는 6·25전쟁 직후 직장이 있는 대구에서 가까운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가솔을 정착시키는데, 칠백리 낙동강이 뒤꼍에서 흐르는 강촌 마을이었다. 중년기 이후 그는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중구 신당동에 얼마간 살다가 종신 자택이 될 여의도의 한 아파트로 이사하여 아침, 저녁으로 한강을 마주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의사인 부인 서영옥이 아직 의원을 운영하고 있던 왜관 집과 서울 집을 오르내리며 낙동강과 한강에서 건져 올린 시상(詩想)으로 강 연작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따라서 구상의 강 연작시의 배경은 칠곡군의 낙동강과 여의도의 한강, 그 두 곳을 꼽을 수 있겠다.

전자는 대체로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을 펼쳐 놓아 시인의 서정적 시상을 자극하여 다음과 같은 시가 쓰이기도 했다.

‘아지랑이가 아물거리는 강에/백금의 빛이 녹아 흐른다.//나룻배가 소년이 탄 소를 싣고 온다.//건너 모래톱에 말뚝만이 홀로 섰다./낚싯대 끝에 잠자리가 조은다.//멀리 철교 위에서 화통차가 목쉰 소리를 낸다.//풀섶에 갓 오른 청개구리가 물끄러미 바라본다.’(강·7)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원효대교 부근 한강공원에 있는 시비.

여기서 ‘철교’는 한국 전쟁사에 남는 다부동 전투에서 폭격으로 끊겼다가 후에 다시 이어진 낙동강 철교를 이르는 것으로, 그 철교 위에서 목쉰 소리를 내는 화통차는 평온한 목가적 풍경 속에 숨겨진 민족적 한(恨)의 에너지를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리라.

6·25전쟁 중 종군기자로 활동하다가 대구에서 영남일보 주필 등 언론계 요직에 있으며 전후 현실의 참상과 정치·사회적 혼란을 진저리나게 보고 겪었을 그가 단순한 서정미학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장택상 전 총리, 장면 전 총리, 박정희 전 대통령, 채명신 전 파월한국군 사령관, 전두환 전 대통령 등 해방 후부터 1970년대 말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에 그가 교유했던 국가적 인물들과의 인연 또한 강물처럼 덧없이 흐르고 흘러 예전 그대로가 아님을 그의 시는 토로하고야 만다.

‘오늘 마주하는 이 강은／어제의 그 강이 아니다.//내일 맞이할 강은/오늘의 이 강이 아니다.//우리는 날마다 새 강과 새 사람을 만나면서/옛 강과 옛 사람을 만나는/착각을 한다.’(강·24)

이 시는 칠곡군에서 건립, 운영하고 있는 구상문학관의 앞뜰에 시비로 세워져 오가는 동네 사람들과 문학관을 방문하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이 시비 앞에서 눈을 들어 바라보면 수년 전 새로 들어선 성주대교 사이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문학관은 2002년 구상의 왜관 집이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그 터에는 그의 부인이 운영하던 ‘순심의원’과 살림채가 붙은 양옥 한 채, 문간채로 세를 주던 한옥 한 채, 그가 사랑채로 쓰던 한옥 한 채가 있었다. 그 뒤로 텃밭이 있고 탱자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낙동강 선창가로 이어지는 과수원 길이 있었다. 선창가에는 당시만 해도 빨래터가 있고 사공이 배를 저어 강 건너 성주로 사람과 짐승을 태워다 주는 나루터가 있었다. 또 선창가 입구 맞은편에는 닷새에 한 번씩 소시장이 들어서 강으로 내려오는 길가의 주막집 두엇을 흥청거리게 만들었다. 그에게 낙동강은 이렇게 일상의 삶 속을 흘러 다가오는 무엇이기도 했지만 한편 초월적 삶을 지향하게 하는 추동력이 되기도 했다.

낙동강 철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의 고향 덕원에서 월남하여 새로이 자리 잡은 성베네딕도수도원이 있는데, 이 수도원이야말로 그가 다른 곳이 아닌 왜관에 가솔을 정착시킨 가장 큰 이유였다. 그의 부친 구종진은 베네딕도수도회가 운영하는 해성보통학교의 설립을 돕기 위해 본적인 서울 이화동에서 원산시 외곽의 덕원으로 솔가해갔고 그의 유일한 형제인 구대준 신부는 베네딕도수도회 소속 사제로서 6·25전쟁 중 공산당에 납치되어 순교한, 그런 연고들이 있기 때문이다. 강을 따라 산책하다 종종 베네딕도수도원과 경내 성당에 들러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갖기도 한 그는 성 크리스토퍼를 수행적 삶의 롤 모델로 삼고 자신의 강 시를 ‘그리스도 폴의 강’ 연작으로 명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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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폴이란 일본에서 공부한 그가 크리스토퍼(그리스어로 크리스토포루스)를 일본식 표기로 받아들인 것으로, 그의 구도적 지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명칭이다. 크리스토퍼는 젊은 시절 힘만 믿고 악행을 일삼다가 어느 수행자를 만나 감화를 받고 사람들을 어깨에 업어서 강을 건네주는 일을 하고 살다가 순교한 가톨릭의 성인이다. 이를 본받는 삶을 살기를 희구하면서 그는 강 연작시의 프롤로그에서 이처럼 선언한다.

‘그리스도 폴!/나도 당신처럼 강을 회심(回心)의 일터로 삼습니다./…(중략)…// 당신의 그 단순하고 소박한/수행을 흉내라도 내 가노라면/당신이 그 어느 날 지친 끝에/고대하던 사랑의 화신을 만나듯/나의 시도 구원의 빛을 보리라는/그런 바람과 믿음 속에서/당신을 따라 강에 나아갑니다.’

그의 가톨릭적 회심과 수행에의 의지는 한강을 만나면서 보다 진폭이 크고 다채로워져 무상(無常)이 출렁이는 동양적 사유의 세계로 나아간다. 여의도에 살면서 틈날 때마다 한강 변을 산책하며 그는 강을 다각도로 유심히 관찰했다. ‘강의 정중동(靜中動)을 일반적인 조망이 아닌 사물 자체에 투철하게 들어가는 관입실재(觀入實在)를 통해 포착’하려 했으며, 자신의 서재에 ‘관수세심(觀水洗心)’이라 쓰인 편액을 걸어놓고 늘 물을 보며 마음을 닦는 자세로 생활하려 애썼다. 그런 그에게 강은 순간순간 새로워지는 물일 뿐 아니라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다다랐던 전일적 의식이 느끼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물이기도 했다.

‘그저 물이었다./많은 물이었다./많은 물이 하염없이/흘러가고 있었다.//흘러가면서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제자리에 있으면서/순간마다 새로웠다.//새로우면서 과거와/이어져있었다./과거와 이어져있으면서/미래와 이어져있었다.//과거와 미래가 이어져서/오직 현재 하나였다./오직 하나인 현재가 여러 가지 얼굴을 하였다.//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서/여러 가지 소리를 내었다./여러 가지 소리를 내면서 모든 것에 무심하였다.//무심하면서 괴로워하고/괴로워하면서 무심하고/무심하게 죽어가고/죽어가면서 되살아왔다.’(강·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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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 구상은 여의도의 가장 오래된 주택인 시범아파트에 살면서 ‘한강에 돛단배처럼 떠 있는’ 63빌딩의 단골 일식집으로 당대 최고 부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이따금 초대해 우동을 대접하는 등 선비의 가난한 풍요를 즐기기도 했다. 이웃에는 농촌운동가로 유명한 류달영 선생이 살았는데, 구상은 여덟 살 연상의 그를 ‘흥부 형님’으로 부르며 ‘놀부 동생’을 자처, 같은 해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타계할 때까지 각별한 우애를 나눴다. 그 우정에 힘입어 설립을 보게 된 인문고전교육재단 ‘성천아카데미’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한강 변에서 배움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성천아카데미의 초대 원장을 맡은 게 인연이 돼 그 재단 멤버들의 후원으로 1994년 건립된 그의 시비가 한강공원 원효대교 부근에 서 있는데, 이는 서울 정도(定都)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다. 그 시비의 앞·뒷면에 실린 두 편의 시 중 ‘강가에서’란 시는 만년의 그의 철학적, 종교적 사상을 아우르는 강 연작시의 백미다. 일찍이 그가 강 연작시를 쓰기에 앞서 가졌던 생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그는 1993년 출간된 자전 에세이집 ‘예술가의 삶’에서 10여 년 후 이 시에서 드러나게 될 세계관을 미리 귀띔한 바 있다.

‘나의 상념은 강을 통하여 역사에 대한 낙관을 획득한다. 즉 우리의 오늘 삶이 아무리 연탄빛 강으로 흐르고 그 오염이 징그럽게 번득이더라도 언젠가는 푸른 바다에 흘러들어 맑아질 그날이 있을 것을 나는 믿고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오늘의 저 눈 뒤집힌 삶이 가엾기까지 한 것이다.’

2004년 영원의 바다로 회귀하기 오래전부터 그는 이미 강의 무상한 흐름을 관찰하고 시 작업을 통해 내면화시킴으로써 인간 역사에 대한 어떠한 체관(諦觀)에 도달했던 듯하다. 깊은 체념… 그리고 그 체념을 ‘관(觀)’하는 정신의 올돌함. 그런 것이 오히려 그가 평생 시적 후렴구로 삼은 ‘영원 속 오늘’을 인식하게 하는, 삶에 대한 궁극적인 낙관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강의 시인 구상의 만년 절창 ‘강가에서’를 들으며 오늘도 이 ‘연탄빛’ 짙은 세상의 강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보아내려 한다.

글·사진 = 구자명 소설가, 구상 시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