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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6년 11월 30일(水)
封事와 독대로 정치 간여… 政爭부른 주범이자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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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20) ‘신념의 정치가’ 우암 송시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소싯적부터 어린애 오줌을 받아먹곤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창자에 오줌버캐가 쌓여 다 죽게 되었다. 백약이 무효였다. 그래서 송시열은 글과 약에는 원수가 없다며 아들을 시켜 허목(許穆)에게 약방문(藥方文)을 부탁하게 했다. 허목이 알려준 비방은 비상(砒霜) 석 돈쭝을 먹이고 죽을 정도로 등줄기를 힘껏 차라는 것이었다. 아들은 허목의 처방을 그대로 보고할 수 없어서 비상을 두 돈쭝 드시게 하고 등을 차라고 했다고 고쳐 보고했다. 송시열은 허목의 처방을 옳게 여겼고, 아들은 비상 두 돈쭝을 드시게 하고 아버지의 등도 살며시 찼다. 그랬더니 송시열의 속에서 뭔가 튀어나왔고, 결국 약을 먹은 만큼만 더 살다가 죽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답게 송시열을 둘러싼 여러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는 정적(政敵)에게 약방문을 청하고 상대는 그 요구에 흔쾌히 응한 송시열과 허목의 담대한 풍모를 담아 꾸며낸 이야기다. 그러나 이야기를 통해 정쟁 속에서도 인간적 신뢰를 잃지 않았던 붕당(朋黨) 정치의 모습을 전하는 또 다른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송시열은 정쟁의 화신이었을까? 아니면 신념의 정치가였을까?

송시열의 어머니는 명월주(明月珠)를 삼키는 태몽을 꾸었고, 아버지 송갑조(宋甲祚)는 공자가 집으로 찾아오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어릴 때 이름을 성인이 보낸 아이라는 뜻에서 성뢰(聖賚)로 지었다. 꿈이 실현되기를 기대한 아버지는 12세 아들에게 “주희는 후세의 공자이고 이이는 후세의 주희”라며, 공자를 배우는 첫걸음으로 이이의 ‘격몽요결’을 가르쳤다. 송시열은 21세 되던 해에 정묘호란을 겪었다. 이때도 아버지는 임금이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가면서 편지로 난리 때문에 학문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편지 속에는 ‘논어’ 이인(里仁) 편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말도 인용되어 있었다. 사는 동안 진리를 깨달았다면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이다. 송시열은 이 말을 일생의 화두로 삼았다.

송시열은 27세 때 생원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해 경릉 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부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했다. 송시열의 실질적인 첫 관직은 29세 때 맡은 대군사부(大君師傅·종9품)였다. 다만 이때 인조 비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서거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위한 본격적인 강학(講學)은 다음해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그해(1636) 겨울에 발발한 병자호란으로 두 사람의 만남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강화도로 들어간 봉림대군과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간 송시열의 피란길이 엇갈렸고, 전쟁 뒤에는 봉림대군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기 때문이다. 봉림대군과의 짧지만 운명적인 대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 송시열은 39세 때 인조로부터 세자 봉림대군을 가르치라는 명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8년 동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가 1645년 4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급서하자, 인조가 그해 윤 6월 2일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세자의 옛 스승인 송시열을 다시 불렀던 것이다. 그 후에도 인조는 41세의 송시열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진선(進善·정4품)으로 불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송시열이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 것은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뒤였다. 효종은 재위 기간 송시열을 세자시강원 진선, 사헌부 장령(정4품)과 집의(정3품),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 세자시강원 찬선(정3품), 예조 참판(종2품) 등으로 거듭 승진시켜 불렀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효종이 재위하던 10년 동안 송시열이 실제로 봉직했던 관직은 47세 때 충주 목사(정3품), 49세 때와 52세 때 이조 참의(정3품), 그리고 52세 때 맡았던 이조 판서(정2품)뿐이었다.

이 기간 송시열이 정치에 간여하던 방식은 주로 봉사(封事)와 독대(獨對)였다. 송시열이 올린 첫 번째 봉사는 효종이 즉위하던 해인 기축년(1649)에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였다. 그의 나이 43세 때였다. 봉사란 국가의 기밀에 관계된 내용을 책자로 만들어 임금에게 직접 올리는 상소를 말한다. 송시열은 기축봉사에서 갓 즉위한 효종이 유념해야 할 13가지 정치 요목을 제시했고, 그 중 마지막 핵심이 ‘정사를 닦아 이적을 물리치는 것(修政事而攘夷狄)’이었다. 논지는 북벌(北伐)의 대의(大義)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51세 때 두 번째 봉사를 올렸다. 효종 8년 정유년(1657)에 올린 ‘정유봉사(丁酉封事)’였다. 송시열은 이 봉사에서 효종이 즉위 후 8년 동안 그럭저럭 세월만 보냈다고 꼬집으며, 임금에게는 털끝만큼의 사욕도 용납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송시열이 경계한 것은 임금 개인의 사욕만이 아니었다. 그는 임금을 빙자해 사익을 추구하는 훈척대신(勳戚大臣)의 비리도 근절하라고 요구했다. 만약 이것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뜻있는 선비들로부터 임금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의지는 없고 향락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송시열은 봉사에서 왕실의 재정 낭비를 줄이고 대동법(大同法)을 개혁해 양민(養民)과 양병(養兵)에 힘쓰자고 제안했다. 송시열은 자신의 말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봉사를 올렸고, 효종도 폐부(肺腑)에서 우러난 지성스러운 뜻이 담겼다며 기꺼이 용납했다.

송시열은 53세 때인 효종 10년(1659) 3월 11일 임금과 독대하는 특전을 누렸다. 이른바 ‘기해독대(己亥獨對)’였다. 두 사람은 독대에서 네 가지 민감한 정치적 현안을 논의했다. 첫째는 북벌 문제였다. 효종은 10년 안에 정예 포병 10만 명을 양성해 북벌을 추진하겠다며 송시열에게 이조와 병조 판서 겸직을 제안했지만, 송시열은 양병뿐만 아니라 양민의 중요성을 거론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둘째는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였는데, 효종과 송시열은 공론이 통일된 이후에 재론해도 늦지 않다는 점에 합의했다. 셋째는 소현세자빈 강빈(姜嬪) 옥사(獄事) 문제였다. 이 옥사는 소현세자가 급서한 후 인조가 자신의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를 올린 범인으로 강빈을 지목해 사사(賜死)한 사건이었다. 이 문제에 관한 송시열의 입장은 강빈의 역모를 입증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효종은 강빈이 역모를 꾀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반박했다. 넷째는 강빈 옥사의 부당성을 상소한 김홍욱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이에 관해 효종은 강빈 옥사를 재론하는 자는 강 씨와 같은 죄로 다스릴 것을 이미 공포한 바 있었지만, 송시열은 효종이 김홍욱을 성급히 장살(杖殺)해 언로를 막았기 때문에 의혹이 증폭되었다고 비판했다. 효종은 독대 후 송시열에게 대화의 내용을 외부에 누설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독대 다음 날 대화의 내용을 기록해 두었고, 송나라 효종이 장식(張식)을 유악(유幄) 안으로 불러 독대한 고사에 빗대 ‘악대설화(幄對說話)’라고 명명했다.

10년 안에 북벌을 완수하겠다고 호언했던 효종은 독대 뒤 두 달 만에 갑자기 승하했다. 그리고 곧바로 효종의 정통성을 시비하는 두 차례의 논쟁이 조야(朝野)를 뒤흔들었다. 첫 번째 논쟁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은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大妃)가 효종을 위해 입을 상복의 종류와 기간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허목과 윤선도 등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자(次子)였지만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로 간주해야 하며, 따라서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송시열과 서인은 효종이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자의대비는 기년복(朞年服·1년복)을 입어야 하며, 상례(喪禮)에는 제왕가(帝王家)와 사대부가(士大夫家)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논란 끝에 첫 번째 예송논쟁은 서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두 번째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은 현종 15년(1674) 승하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를 위해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의 종류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이때도 서인들은 장자와 서자를 구분했던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자의대비의 복제는 둘째 며느리를 위해 입는 대공복(大功服·9개월복)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효종을 장자로 간주했던 남인들은 첫째 며느리를 위해 입는 기년복을 주장했다. 기해예송 때는 서인의 위세에 눌렸던 현종도 이번에는 밀리지 않았다. 현종은 아버지 효종의 적장자 지위를 부정한 서인의 주장에 격분했고, 어머니를 위한 복제만은 첫째 며느리를 위해 입는 기년복으로 확정했다.

갑인예송이 현종과 남인의 승리로 종결되면서 서인은 급속히 몰락했다. 69세의 송시열에게도 예송을 잘못 이끈 책임을 물어 유배형이 내려졌고, 결국 그는 74세 때까지 덕원, 장기, 거제, 청풍 등의 유배지를 전전했다. 송시열이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숙종 6년(1680)이었다. 이때 성년을 맞은 숙종은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단행해 서인들을 다시 기용하기 시작했고, 송시열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정1품)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숙종 15년(1689)에 발생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그는 다시 제주로 귀양을 떠나야 했다. 희빈 장씨가 출산한 왕자를 숙종이 원자(元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이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국문(鞫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83세의 노학자가 남긴 마지막 말은 그의 일생을 웅변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스스로 다짐했는데, 끝내 들은 바 없이 죽는 것이 한이다.”

송시열은 신념의 정치가였다. 그는 주희의 학설을 진리라고 믿었고, 주희의 학설에 대한 단 한 자의 정정도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진리는 임금에게도 예외가 없다고 맞섰다. 그러나 그는 신념을 달리하는 정치가를 정적으로 몰았고, 자신도 정쟁의 표적이 되어 변덕스러운 왕권에 희생되었다. 그는 신념윤리에 충실한 정치가였지만, 신념윤리가 초래한 반동의 정치를 세상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정치가에게는 동기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신념윤리만큼이나 권력투쟁이 만들어낸 악마적 결과들까지 감당하는 책임윤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화일보 11월2일자 26면 19회 참조)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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