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전망대>박근혜 리스크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6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개최된 5차 주말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플래카드와 촛불을 들고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첫눈이 내린 추운 날씨에도 서울에서만 주최 측 추산 150만 명이 참여한 촛불집회에 대해 외신들은 “선진적인 시위 문화를 보여주는 새로운 차원의 평화 집회”라고 평했다. 연합뉴스

신보영 워싱턴 특파원

지난 19일 95만 명이 운집한 제4차 촛불집회 이후 미국 언론들의 관련 기사 보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10월 29일 1차 촛불집회까지만 해도 뉴욕타임스(NYT)·워싱턴포스트(WP) 등에 간간이 등장했던 기사 게재 빈도가 확 늘었다. 특히 검찰이 지난 20일 박근혜 대통령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공범으로 기소한 뒤부터는 박 대통령의 가명 ‘길라임’에서부터 청와대의 비아그라 대량 구입 사실까지도 속속 보도하고 있다. 기사에는 무당(shaman)에 이어, 마비(paralysis)·공백(vacuum)이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하지만 최근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바로 ‘리스크(위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제5차 촛불집회 직후인 27일 “박 대통령이 탄핵을 모면한다고 해도 정권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면서 한·미 관계에도 리스크를 안겨줄 것”이라고 전망한 것. NYT도 지난 19일 사설에서 “해외에서 한국의 평판에 가장 큰 리스크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면서 “특히 역사를 다시 쓰고, 반대의견을 진압하려는 박 대통령의 가혹한 시도”라고 평가한 바 있다.

가히 ‘박근혜 리스크’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박근혜 리스크’는 국격 추락을 넘어 경제에도 실질적 악영향을 미칠 태세다. 정치 불안이 한국 시장의 불확실성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영사인 블랙록의 아시아 담당 책임자인 벌린다 보아는 최근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지금 우리에게 중대한(significant) 리스크가 되고 있다”면서 “북한 문제에 더해, 박 대통령을 둘러싼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한국은 역내의 주요(major) 걱정거리가 됐다”고 밝힐 정도다.

워싱턴에서도 이런 인식은 확실히 확산세다. 최근 워싱턴에서 싱크탱크 고위 인사를 만난 정치인 출신의 한국 인사는 “박 대통령이 탄핵되는 건지, 개헌이 되는 건지 등 한국 상황을 집중적으로 캐묻더라”고 전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들은 공개적으로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번 사태로 당분간 한국과의 교류는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달 초 만난 한국계 인사가 “이건 국격 문제로,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워싱턴에서 한국의 영향력이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던 전망이 이미 현실이 된 셈이다.

특히 외교·안보에서 ‘박근혜 리스크’는 최대 악재다. 공교롭게도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과 주한미군 철수를 시사했던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8일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상황과 맞물리면서 한·미 양국에서 모두 불예측성이 커졌다. WSJ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최근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 측에 “북핵 위협이 차기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라는 입장을 전달한 상황에서 한국의 국정 공백이 한·미 공조에 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스콧 스나이더 미국외교협회(CFR) 선임 연구원도 최근 뉴스위크 기고문에서 “박 대통령 사임 여부에 관계없이 국정은 몇 개월간 마비될 것”이라면서 “북핵 위협에 미국 권력 이행기까지 겹치면서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미 공조의 차질은 이미 올해 2차례 핵실험을 강행했던 북한의 오판을 또다시 부를 수 있다. 미국 정권 교체기마다 도발해왔던 북한으로서는 한국이 미국의 귀를 잡지 못하는 지금이 미국을 상대로 담판할 수 있는 최대 호기라고 판단할 것이다. 반면 대북정책이 거의 ‘백지’에 가까운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하는 데에는 국무부·국방부 실무책임자들이 자리 잡는 내년 여름까지가 ‘골든 타임’인데, 현 정권의 임기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한국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으려고 하겠는가. 정치권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하루라도 빨리 안정적으로 정국을 수습해야 하는 이유다. 북핵 대응에서도, 한·미 관계에서도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니다.

boyoung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