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종림 스님 ‘고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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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논설위원

‘불생역불멸(不生亦不滅) 불상역부단(不常亦不斷)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 불래역불출(不來亦不出)’.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으로 전해오는 ‘중론(中論)’ 첫 대목으로,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새로 생겨나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없다. 항상 같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는다.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72) 스님은 평생 천착해온 ‘중론’에서 이 부분을 가장 즐겨 되새긴다.

종림 스님이 1011년 조성된 고려 초조(初雕)대장경의 인쇄본 2040권을 재복원해 봉안하기 위한 전각 ‘천년지장(千年之藏)’을 건립하며, 그 스무 자를 두 기둥의 주련(柱聯)으로 삼은 이유도 달리 없다. 목판이 전해오지 않은 채 당시 인쇄본만 부분적으로 국내 사찰·박물관·미술관과 중국·일본 등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집한 뒤 전통 방식으로 닥종이에 옮기며 거듭 떠오른 내용인 셈이다. 종교와 무관하게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 많은 종림 스님이 ‘무애(無애)의 자유인’이고 ‘학문과 문화의 아나키스트’여서, 그 주련의 의미가 더 가까이 가슴에 다가온다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철학부터 과학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만화를 즐기면서 말이 드문 그가 주름 가득한 얼굴로 ‘하회탈 미소’를 지으며 무심코 툭 던지는 듯한 한마디에도 인간과 세상사에 대한 통찰과 삶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체험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불교 경전을 넘어 ‘문화 콘텐츠의 보고’이기도 한 고려대장경의 학술적·문화적 가치의 재창조와 현대적 활용을 위해 고려대장경연구소를 1992년 설립해 세계 최초로 ‘대장경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대장경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왔다. 그런 그가 고향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장자 마을 뒷자락에 ‘천년지장’을 부속 건물로 삼은 ‘지혜를 생각하는 집’이란 의미의 책박물관 ‘고반재(考般齋)’를 세워, 3일 개관식을 한다. “나의 가장 멋있는 모습은 고원의 벌판에서 괭이 들고 땅을 파다가 석양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 그는 “산도 들도 아니고, 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꿈을 펼 만한 곳은 아니고, 오히려 꿈을 묻을 만한 곳”이라며 “남은 꿈이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란다”고 말한다. 문화적으로 매우 귀중한 공간의 탄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