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깨지고 불에 타고 잃어버리고… ‘진품’ 지키려 ‘복제품’ 제작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메이저 트로피’ 수난의 역사

메이저대회 우승 트로피는 수난의 역사를 지녔다. 파손되거나 불에 타거나 분실됐기 때문이다.

1926년 미국프로골프(PGA)투어 PGA챔피언십 시상식장. 주인공은 풍운아인 월터 헤이건이었다. 2연패에 성공하면서 ‘워너메이커’ 트로피를 수상할 차례를 기다렸다. 지난해 트로피 반납자, 올해의 수상자가 동일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작 트로피는 현장에 없었다. 주최 측이 그에게 물었다. “헤이건 씨, 트로피를 가져와서 우선 반납 절차를 밟으셔야죠.” 헤이건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가져올 필요를 느끼지 않아 안 가져왔는데요.” 당시 PGA챔피언십 트로피는 4대 메이저대회 중에서 그다지 대접을 받지 못했다.

1927년에도 헤이건이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헤이건은 그러나 이듬해 곤경에 빠졌다. 1928년 레오 디겔이 헤이건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트로피를 반납해야 할 시점이 찾아왔다. 시상식에서 디겔은 빈손으로 온 헤이건에게 “트로피는 어디 있나요?”라고 물었다. 헤이건은 우물쭈물하며 몇 년 전 트로피를 잃어버렸다고 털어놓았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시카고 올림피아필드에서 열린 1925년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헤이건은 나이트클럽에서 파티를 열었다.

술에 취한 헤이건은 귀가하면서 트로피를 길바닥에 놔둔 채 택시를 탔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헤이건은 택시기사에게 호텔로 트로피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택시와 택시기사는 사라졌고 트로피는 실종됐다. 트로피 제공자였던 로드먼 워너메이커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무식한 놈 같으니라고…” 하면서 분노했다. 결국 똑같은 트로피를 하나 더 만들 수밖에 없었다.

헤이건이 잃어버린 PGA챔피언십 트로피는 5년이 지난 1930년 디트로이트에 있는 헤이건 소유의 골프클럽 제작회사인 ‘영&컴퍼니’ 창고에서 발견됐다. 직원이 창고를 청소하다 상자에 처박혀 있던 트로피를 찾았다. 택시기사는 헤이건의 에이전트에게 트로피를 되돌려줬지만 회사 직원이 보관을 잘못했던 것. 어렵사리 되찾은 진품 트로피는 현재 플로리다의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보관돼 있다.

US오픈은 1895년부터 우승자에게 진품 트로피를 수여했다. 1년간 우승자가 보관한 뒤 매년 다시 반납하며 50년이 넘도록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1946년 어느 날 일리노이주의 톰 오션터 골프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US오픈 우승자였던 로이드 맹그럼은 이 골프장의 클럽하우스에 트로피를 전시해 놨는데 화재로 인해 트로피가 완전히 녹아버렸다. 미국골프협회(USGA)는 부랴부랴 새 트로피를 만들었다. 그 후 40년이 지난 1986년까지 새로 제작된 트로피를 우승자에게 수여했다. USGA는 1983년 뉴저지 미국골프박물관에 진품 트로피를 영구 보관하고 대신 복제품을 우승자에게 수여하기 시작했다.

1982년 디오픈 챔피언 톰 왓슨은 집에서 보관하던 클라레 저그를 깨트렸다. 진품 클라레 저그는 영국왕실골프협회(R&A) 박물관에서 보관해 왔다.

1927년부터 시상식 때 잠깐 진품 클라레 저그를 우승자에게 전달하고 복제품을 우승자가 가져가도록 했다. 복제품도 분실을 우려해 1년 뒤에는 반납하도록 했다. 하지만 R&A는 실수로 왓슨에게 진품 클라레 저그를 건넸고, 왓슨은 집에서 스윙 연습을 하다 실수로 클라레 저그를 바닥에 떨어트려 손잡이가 파손됐다. 안절부절못하던 왓슨은 수소문 끝에 은 제품 전문가를 찾아가 수리했다. 원상태로 복원된 듯 보였지만 ‘상처’는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왓슨은 고민 끝에 R&A에 양심 고백을 했다. “완벽하게 수리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하며 클라레 저그를 반납했다. R&A는 왓슨이 반납한 클라레 저그가 복제품이라고 여겨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추후 진품이라는 걸 알고 아연실색했다.

이후 진품은 박물관에 영구 보관됐고,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유출되지 않았다.

남양주골프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