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評>‘박근혜 悲劇’ 서사시로 마무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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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구 고려대 교수·경영학

대한민국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대서사시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아니, 그 종착점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고 있는 듯하다. 전직 대통령마다 비슷한 문제를 일으켰지만, 이번 사건은 그 규모나 내용 그리고 국민의 반응이 달라서 후대의 역사가들이 대서사시라고 일컬을 만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제 나라의 산적한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풀고 물러서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게 옳다. 소용돌이치는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냉정히 따져 보고 ‘나는 여기까지’라는 생각을 하는 게 옳다. 아무리 억울해도, 수십 년간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도와준 사람에게 편의를 베풀었던 것뿐, 사심을 가지고 행한 게 아니라 생각한다 하더라도, 지난 두 달 남짓 동안 대한민국 국민을 비탄과 우울에 빠뜨리고 거리로 나서게 한 것만 해도 이미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보는 게 옳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역사에 어떻게 남아야 할까. 미증유의 비극적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흔히들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라지만 역사에 오랫동안 남는 사람은 승패와 관계없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사람이다. 사람의 가슴을 깊게 울리는 것은 영웅적 행위 속에 숨겨진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인간의 허약함이다. 박 대통령에게는 ‘일생을 국가를 위해’ 바친 삶 속에 숨겨진 인간적 고뇌와 허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국민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 역사에 남는 길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비극(悲劇)은 고통과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청중의 정신건강에 해방의 기쁨을 주는 일종의 치료 효과를 갖는다. 나쁜 사람이 잘못한 행동 때문에 벌을 받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다루거나, 착한 사람이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드라마는 비극이 아니다. 인간이 지닌 비극적 약점, 도덕적 결점 또는 불리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나쁜 행동에 시나브로 빠져들어 스스로 파멸하는 것이 바로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본인이 원했든 안했든, 의도했든 안했든 이미 국민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줬다. 즉, 비극은 이미 시작됐다. 그러한 고통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비극적 서사시에 걸맞기 위해서는 연민을 통해 국민에게 건강과 해방의 기쁨을 안겨주는 것만 남은 게 아닐까. 변명하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함으로써 국민의 아픈 가슴을 씻어 주고 어루만져 주는 게 국가를 위한 최고의 애국이 아닐까 한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은 비극의 플롯상 자신의 인간적 취약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뿐이다.

자신의 인간적 취약성과 잘못을 솔직하게 밝히는 용기는 이 비극적 서사시의 완성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국민과 국가, 그리고 리더들에게 따끔한 교훈도 제공할 수 있다.

아무런 사적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국민만을 바라보고 행동하고 살아왔다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그토록 위했던 국가와 국민을 힘들게 했다면 모든 책임을 무한대로 지는 것이 훌륭한 리더의 특징이다. 또한, 리더로서의 마지막 남은 책무는 이같이 국가를 뒤흔드는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즉, 솔직한 고백은 잘못된 모든 일을 최순실 등에게 전가하려는 일부 세력의 책동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공개함으로써 그동안 국민에게는 숨겨진, 그러나 권력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챙겼던 이들에게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었던 권력에 기대어 자신의 이익을 챙겼던 이들을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권력에 기대어 사익을 추구하다 실패한 사람과 희생자를 구분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미 제기된 무수한 의혹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도 숨겨진 권력에 기대어 이익을 추구하려다 실패한 사람들의 분풀이성 의혹 제기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통령 제도의 비극적 대서사시를 마무리하면서 한국의 모든 정치인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자신의 정치적 판단과 결정이 자신이 대표하는 지역이나, 더 크게 보면 대한민국의 이익을 진정으로 생각하면서 이뤄지고 있는지, 아니면 ‘좋은 의도’로 행동하면서 궁극적으로 유권자의 표를 얻는 수단으로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천 번은 되물어봐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비극적 대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