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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6년 12월 07일(水)
是是非非조차 가리지 않는 마음, 그것이 순수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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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

김정탁의 장자 이야기 - (20) 人爲보다 無爲自然

‘늙을’ 노(老)는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나이가 들어 한물가서라 생각해서다. 또 나이가 들면 추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노추(老醜)란 말이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원숙하다’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됐다. 나이가 들면 경륜이 쌓여서다. 노자(老子)란 이름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숙하다는 것보다 나은 게 순수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해맑은 얼굴을 유지할 수 있으면 원숙한 것보다 나아 보이지 않는가? 공자도 이런 순수한 모습을 인생의 최종 목표로 삼은 것 같다. 나이 70에 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즉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난 게 없다’고 말해서다. 그만큼 순수한 모습을 지니면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해도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우리는 원래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다. 살면서 이런 마음을 하나씩 버려왔기에 원래의 모습에서 너무 멀어진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자괴감도 든다.

왜 이리됐을까? 장자는 시비(是非)를 가린 탓으로 본다. 이것은 옳고(是), 저것은 그르다는(非) 판단을 해서다. 마치 원숭이가 조사모삼(4+3)은 옳다고 여겨 기뻐 날뛰고, 조삼모사(3+4)는 그르다고 여겨 화를 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비단 원숭이에게 국한된 것일까? 아니다! 인간은 매사를 이런 식으로 시비판단하며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겐 시비판단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누군가 자신에게 화를 내도 미소로 응답하고 만다.



장자는 ‘시비판단을 하지 않는(未始有是非)’ 사람을 지극한 사람(至人)이라 말한다. 이런 지인은 세상 만물을 이것/저것으로 구분할 뿐이다. 그래서 강남이 있으면 강북이 있고, 도시가 있으면 농촌이 있고, 동양이 있으면 서양이 있다고 구분할 뿐 강남은 현대적인데 강북은 전통적이라든가, 도시는 살기 편한데 농촌은 불편하다든가, 동양은 좋은데 서양은 나쁘다는 식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원숭이 주인을 통해 잘 나타난다. 그는 조삼모사와 조사모삼은 구분하지만 어느 게 옳고 그르다는 식의 판단을 하지 않아서다. 물론 이런 판단은 큰 지식(大知)을 지닐 때 가능하다. 그러니 큰 지식을 지닌 사람의 기본 자질은 시비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장자에 따르면 이보다 더 지극한 사람이 있다. 그 지인은 오로지 사물의 존재만 의식하는 사람이다. 시비판단은 물론이고, ‘이것/저것의 구분조차 없다(未始有封)’. 이런 지인에겐 왜 이것/저것의 구분조차 생겨나지 않는 걸까? 저것은 이것으로 인해, 이것은 저것으로 인해 생겨난다고 보아서다. 말하자면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을 믿으며 살아가서다.(2016년 8월 17일자 26면 16회 참조) 이런 지인은 이것/저것은 다르지만 동시에 짝을 이루는 하나이므로 이것/저것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보면 피시방생지설도 불가의 불이론(不二論), 즉 이것과 저것은 둘이면서 둘이 아닌 하나라는 주장과 같은 맥락에 있다.

장자에겐 이보다 더 지극한 사람이 있다. 처음부터 ‘사물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는(未始有物)’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사물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기에 노장사상의 핵심 개념인 허(虛)가 자리한다. 허란 비워진 상태다. 그러니 허는 없는 게 아니라 있지만 비워져 있기에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허는 무(無)와 그 의미가 다르다. 무란 말 그대로 없음을 의미하지만 허(虛)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단지 비워져 있을 뿐이어서 불가의 공(空) 개념과 통한다.



불가에서 공의 반대 개념은 색(色)이다. 색이 오관의 감관작용을 통해 파악되는 경지라면 공은 감관작용을 멈춤으로써 사물의 존재가 의식되지 않는 경지다. 그래서 ‘금강경’의 정수인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말한다. “공 가운데에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空中 無色無受想行識).” 나아가 “눈·코·귀·혀·몸·뜻의 육근(六根)도 없으며, 색·소리·냄새·맛·접촉·법의 육경(六境)도 없으며, 눈 경계부터 의식 경계까지 없다(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無意識界)”고 말한다. 이는 인간커뮤니케이션 수단인 감관작용을 중지하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인 심관작용도 멈추라는 의미다. 이런 상태가 불가식 해탈(解脫)이다.



장자는 이런 상태에 이른 지인은 너무나 지극해서 더 이상 보탤 게 없다고 잘라 말한다. 어쩌면 이런 지인은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일 뿐이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른 지인, 즉 세상 만물을 이것/저것으로 구분하지 않는 지인도 너무나 훌륭해서 아무도 쉽게 넘볼 수 없다. 그러니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 지인은 첫 번째 유형, 즉 세상 만물을 이것/저것으로 구분할 뿐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식의 구분을 하지 않는 존재다. 장자에 따르면 이 정도에 이르러도 훌륭한 지인에 속한다. 장자는 이 정도만으로도 왜 훌륭한지를 거문고를 아주 잘 탔다는 소문(昭氏)이란 최고의 예술가를 통해 보여준다. 소문은 소리를 이것/저것으로 구분했기에 장자의 기준에선 지극한 사람이 아니다.



소문의 거문고 타는 기술은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후세까지 그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연주가 완성됐다고 믿었다. 이런 완성된 연주는 좋은 소리는 택하고, 나쁜 소리는 버림으로써 이룬 결과다. 그러니 연주자는 소리를 좋은 소리와 나쁜 소리로 구분해야 한다. 마치 원숭이가 조삼모사와 조사모삼을 구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결과 완성된(成) 연주와 완성되지 못한 이지러진(虧) 연주의 구분이 생겨났다. 이에 장자는 “연주의 완성됨과 이지러짐이 구분되는 건 옛날 소문이 거문고를 뜯어서”라고 주장한다. 만약 소문이 애초에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소리의 구분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문의 거문고 연주는 완성됐는지 모르지만 소리를 좋고 나쁨으로 구분함으로써 도(道)에 입각한 소리와 멀어졌다.



사광(師曠)은 춘추시대 진(晉)나라 평공의 악사로 음률에 매우 밝았다. 그도 소문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예술가였다. 그는 음률을 만들 때 호불호(好不好)의 잣대로 음률이 완성됐는지, 이지러졌는지를 일일이 검토했다. 그 결과 자신이 생각하는 완성된 음률을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그 음률은 자연의 음률과 멀리 떨어졌다. 또 유명한 논리주의자 혜시(惠施)도 오동나무 안석에 기대앉아 명쾌한 논리를 늘어놓았지만 도에 입각한 시비판단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재지에 탐닉해 남과 다른 방법으로 그걸 드러내려 했지만 이 과정에서 드러낼 수 없는 부분까지 드러냄으로써 자연의 결을 훼손했다. 그래서 그의 변설은 견백론(堅白論), 즉 ‘단단하고(堅) 흰(白) 돌은 흰 돌이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끝났다.



장자는 우리에게 뜬금없이 묻는다. “거문고 연주의 명인인 소문과 북 두드리는 데 달인인 사광, 또 변론의 명수인 혜시의 작업을 완성된 것이라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장자는 겸손함을 보인다. 그래서 장자 자신은 설령 완성됨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들의 작업을 완성된 것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다시 묻는다. “소문과 사광의 연주, 혜시의 변설을 완성되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장자는 겸손함을 또다시 드러낸다. 그래서 이들의 작업을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 말하면 장자나 우리나 완성됨을 이룬 게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면 소문·사광·혜시의 작업들이 도에서 너무 멀리 나갔다는 앞서의 주장과 상치되는 게 아닌가?



그렇다! 지금 장자나 우리나 소문·사광·혜시가 일궈낸 작업에 대해 잠시 판단이 흐려졌다. 그래서 이들의 작업을 훌륭한 것이라 착각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작업이 완성됨에 이르렀더라도 자연의 결과 어긋났기에 최고의 작업은 아니다. 장자에 따르면 성인은 자연의 결을 훼손해 참된 도를 흐리게 하는 빛, 즉 활의지요(滑疑之耀)를 다스리는 사람이다. 앞서 성인을 명성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 즉 무명(無名)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말하지 않았던가.(2015년 11월 25일자 24면 7회 참조) 그러니 성인은 옳음/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식으로 완성됨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에 따른 참된 완성은 어떻게 해서 이뤄질까? 장자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밝음(明)을 통해 가능하다. 자연스러운 밝음이란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지 않고 평상시 한결같은 상태, 즉 제용(諸庸)에 머무는 일이다. 이것이 소요유(逍遙遊) 마지막을 장식한 무하유 마을(無何有之鄕)이나 광활한 들판(廣莫之野)에 심겨 있는 큰 가죽나무와 같은 처신이다.(2015년 12월 23일자 24면 8회 참조) 이 가죽나무는 가만히 있는 채로 사람들에게 쉴 공간을 크게 마련해 줌으로써 소요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음의 쓸모’, 즉 무용지용(無用之用)을 실천하는 작업이다. 이럴 때 그 큰 나무가 재목감으로 쓰이는 유용지용(有用之用)보다 훨씬 큰 쓸모를 자랑하다.



장자사상의 핵심인 ‘내편’은 응제왕(應帝王)으로 끝난다. 왕(王)과 제왕(帝王)의 통치방법을 구분하려 해서다. 왕의 통치가 인위(人爲)적으로 기획하고 관리하는 거라면 제왕의 통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무위(無爲)적이다. 그래서 제왕의 존재는 백성에게 잘 느껴지지 않는다. 시중에 훌륭한 지도자는 똑똑하지만 게으른 사람이란 우스개 얘기가 있다. 아랫사람들에게 일을 철저히 위임해서다. 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동안의 국정운영에서도 무능함을 드러냈는데 탄핵 사태에 직면한 지금조차 혼자서 살 궁리를 위해 온갖 잔머리를 굴려서다. 그러니 시비판단을 중지하고 무위자연의 순수한 입장에서 민심을 바라보는 지혜가 요구된다. 이래야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도 그나마 소요할 수 있는 여유와 자유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문화일보 11월 9일자 24면 19회 참조)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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